[묵상글]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전봉석 2018. 4. 14. 07:2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누가복음 4:2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3-4

 

 

 

‘너나 잘해’ 하는 말과 ‘너도 똑같잖아’ 하는 말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서로 잘 안다고 여기는 사이에서 특히 더 어렵다.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말을 건네는 까닭과 같겠다. 이어 말하기를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 27:40).” 이와 같은 논조는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인은 건너와 뜬금없이 궁색한 나의 형편에 대해 우려하였다. 명색이 남자면, 가장이면, 하는 논리로 밥벌이의 숭고함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하듯 말하였다.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지’ 하는 식의 말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때론 그것으로 주눅 들 때도 있다. 왜 이러고 있나, 싶은 것이다. 그때마다 주의 은혜를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 돌아보니 내가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학비를 내 손으로 낸 적이 없다. 이를 그저 특별한 경우로 받으며, 다 그런 건 아니지 않느냐? 하고 저는 물었다.

 

일률적으로 같은 형태는 아니겠으나 내가 아는 목회자들은 다 그와 같은 고백을 간직하고 산다. 나는 그리 말해주었다. 주변에 늘 큰 교회가 있고, 저들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겠으나, 단지 ‘돈의 논리’로 교회의 이루어짐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른 성도’가 있어 저들이 십일조도 내고 감사헌금도 내야 교회도 운영이 되는 거지, 안 그렇겠나? 하는 식의 논리에는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가 없을 거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단호히 맞섰다. 내가 아파서 아파하는 이를 알겠고, 내가 가난하니까 가난한 아이들의 사정을 헤아리게 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더 나은 조건과 환경에서 사역을 감당하셨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셨을까? 되레 예수님을 잘 안다고 여기는 이들이 예수를 가장 몰랐다. 노인은 나의 형편과 사정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었으나 나는 그것으로 주의 은혜를 담아내는 일에 대하여 설명해주고 싶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눅 4:23).” 저의 안타까움이 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점심 때 목감기로 병원에 들렀다가 아내가 같이 와서 밖에서 식사를 했다. 다들 참 자기 고집대로 사는 것 같다고 하자 뜬금없이 당신도 그렇잖아! 하는 식으로 말을 받았다. 너나 잘해, 하는 식의 응대에는 뭐라 더 할 말이 없게 만든다. 그런 논리면 이 땅의 누가 무얼 가르칠 수 있겠으며 뭐라 권면하고 조언할 수 있겠나.

 

그러게, 주 앞에 누가 설까?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 결코 바울이 우리보다 나은 자여서 그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된 이들이 어떤 자격과 기준이 되어 선발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전할 수 있는 게 복음이다. 나는 괜찮으니 너나 잘해, 하는 식의 논조로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 되레 저는 예수를 절벽 아래로 밀어뜨리려 한다.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눅 4:29).” 우리는 다만 그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30).” 돈이 많으면 만족함이 더합니까? 교회가 부흥하면 보다 나은 목회입니까? 나는 노인에게 되물었고, 어떠하든 내 생의 지금이 가장 감사하고 만족하다고 하였다. 누가 자기 힘으로 주 앞에 설까?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보람을 채울 수 있을까? 우리의 죄악을 아신다. 사유하심은 주께 있다. 주를 경외함으로 만족할 수 있다.

 

신앙이란 저항할 수 없는 힘듦과 어려움에 봉착하는 일이다. 고된 훈련과 같다. 훈련을 마다하고 훌륭한 선수는 없다. 이 땅에서의 성과를 운운하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어쩌면 아직 실전은 오지 않았다. 본선 경기는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이다. 저가 이런저런 말로 나의 형편을 걱정하는 듯 우려하는 까닭은 그의 안에 ‘잘 안다’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저의 동서도 목사다. 장인은 만석지기로 인천의 모 감리교회를 세울 때 일조를 했다. 처가 쪽이 모두 믿음에 뿌리를 두고 산다. 그런들 사는 게 다 그 모양이라!

 

혀를 끌끌 차는 저에게 되묻고 싶은 걸 참았다. 그래서 당신은 돌아보아 그 삶이 충만하시는가? 늘 건정 근심에 둘려 입만 열면 모든 타령이 염려뿐이면서. 그 좋은 돈으로 어찌 충당하지 못하시는가? 잘 건사한 육신으로도 감당이 안 되시는가? 그저 다만 벼랑 끝으로 밀어뜨리려는 말 앞에서는 응수할 말이 없는 법이다. 그저 묵묵히 저들 사이를 지나갈밖에. 성경은 이르신다. 믿음에 굳게 서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왜 남자만인가, 하는 말꼬리 앞에서는 뭐라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어머니 하나님이라니! 그런 식이다. 삐딱하게 서서 오히려 나름의 이해와 상식으로 종교를 삼는 게 이단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라면, 하는 식의 언변에는 불신앙만 묻어날 뿐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저런 논리의 말과 대면하면 피로하다. 당신도 그렇잖아! 하는 식의 반문 앞에서는 뭐라 더 할 말도 없다. 너나 잘해, 하는 식이면 말이다. 말이 들어갈 틈이 없다. 자식은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기어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본인은 이혼하여 본가에서도 골칫덩이라. 딸애는 더 이상 저를 보지 않는다. 그런 이가 걸핏하면 하늘을 삿대질한다. 한때는 나름 교회 집사였고 경건을 도모하던 자이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번번이 망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자, 저의 거친 언행은 급기야 안 보이는 하나님을 상대하지 못해 처와 자식에게 분풀이였다. 그런 이도 있다. 저는 말끝마다 울분이다. 하나님은 의롭다면서 이게 뭐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 말씀이 어그러진 가운데는 은총도 없다. 엎어놓은 간장종지다. 부어도 다시 부어줘도 받아낼 줄 모르는 일이다. 한편으론 노인의 너스레가 본질적으로 기우는 것 같아 의아했다. 저의 말을 들어내는 일도 고역이라. 한데 그처럼 다 쏟아내게 해주어야 하는 거였다.

 

나는 저에게 내가 붙든 말씀을 들려주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다른 더 좋은 수 있나? 그럼 그리들 가시라. 나는 다만 저들 사이를 지나오는 일이다. 우리가 얼마나 죄에 얽매여 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뿌리치고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는 이들도 많다. 나만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게 아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아닙니다, 내가 아는 내 주변의 믿는 이들은 다 똑같습니다. 나의 말에 노인은 갸우뚱 고개를 젓는다. 왜냐하면 자기 눈에는 믿는다는 이들이 다들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저가 알 수 없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로부터 인내함으로 경주한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이를 말로다 설득할 수 없다. 그래 맞다, 나도 같다. 나나 잘 하는 게 본이 되는 세상이다. 누구 말도 귀 기울이지 않는 데서, 우리는 시작하는 일이다. 무엇으로 맞서 증거할 것인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저항이 불가능한 삶의 현실에서 이를 훈련으로 삼아 본선을 준비하는 게 신앙이다. 나는 노인에게 이를 말하여 주고 싶었다. 이제 길어야 십 수 년 남은 삶이 고작일 텐데, 뭘 그리 장담하는가?

 

돌아오면 회환과 고난의 생이었을 뿐인데…. 나는 저에게 말해주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5:10).” 누군 후회와 고통만 남았는데, 나는 모든 게 은혜이고 감사할 것뿐이라는! 나의 말에 저는 그저 혀를 끌끌 찰뿐이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30:2).” 우리는 깊은 슬픔에서도 조용히 부를 이름이 있고, 아뢰어 고할 든든한 주인이 계시다. 누가 주 앞에 의연히 설까? 다 그래, 너나 잘해, 하는 따위의 논리로는 그 귀에 들릴 리 없다. 다 그렇든 어떻든 주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더 어떤 만족을 추구해야 할까?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나의 이 만족함에 대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