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시니라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누가복음 5:15-16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소문으로 듣고, 상식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으려 할 때 우리의 신앙은 겸사겸사 겸하여 섬기는 게 된다. 마음의 위로를 얻고자 하며 서로의 위로로 위안을 삼으려, 나름의 보람을 이루어가며 어떤 성취감으로 간증을 삼으려, 여러 모임의 좋은 점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바라는 마음 정도에서,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칠 겸하여’ 어쩌면 몰려다니는 신자란 이와 같이 부수적인 이유와 목적을 지니고 교회를 다닌다. 사람이 좋고 목사의 인품도 훌륭하여, 서로 나누는 살가움도 있고 그나마 다른 데 보다 나은 것 같아서.
오늘 말씀은 이렇듯 겸하여 섬기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성경의 진리는 때로 편협하게 들린다. 좋은 게 좋은 거란 우리의 상식을 무참히 깬다. 아니면 이쪽보다 더 나은 저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그나마’의 신앙을 차단하시는 듯하다. 이는 섬김의 도리에서 어긋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실용성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이와 같은 믿음은 고립을 자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주일에 못 올 것 같다며 그 이유로 숙제가 많고 글도 써야 해서 그런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번만’ 그러는 것이라 말을 더했다. 어쩔 수 없지, 하고 듣고 말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안 돼! 그러지 마!’ 하고 나는 단호하게 일렀다. 그와 같은 핑계와 변명이 생겨날 때가 되었다. 그럼 다음엔 시험 때여서 또는 어딜 가야 해서, 하는 이유들이 늘어나게 돼 있다. 이겨내자. 꾹 참고 와라. 여 와서 해라. 단호한 내 말에 아이는 네, 하긴 했지만.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섞으려 들고 한데 어우러지려 하는 풍토다.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서는 그게 낫다. 이치에 맞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게 두루두루 좋은 거라 여긴다. 신앙에 물 타고, 믿음의 확신에 적당한 허용의 가치를 모색한다. 종교의 화합을 도모하고 같이 상생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를 경계하면 편협한 기독교가 된다. 융통성 없는 신앙인이 된다. 고지식하고 별난 위인으로 여긴다.
실제 그러면 저들은 또 그리 물에 물탄 듯 흐리멍덩한 신앙을 굳이 바라지도 않는다. 나름은 다른 종교라 또는 무신론이라 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척 굴지만,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마치 ‘가인의 제사’ 같은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을 섬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그래서 저마다 곡식의 신과 바다의 신과 비를 내리는 신과 태양의 신 들처럼 정안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더러는 자신의 양심이 자신이 외면하는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5).” 주춤하고 괜히 제 발 저려 움찔하면서, 자연의 증거를 허튼 데 고개를 돌려 하나님 아닌 하나님을 섬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신을 부정하면서도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어떤 공포 같은 또는 경이로움을 찬송한다. 그 주인을 외면하고 그 작품을 경탄하는 일 같다. 그러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2-4).”
내가 아이에게 ‘안 돼!’ 하고 단호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이 또한 붙잡아주셔야 할 일이지 어떻게 내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님을 알았다. 나오긴 나오되 하나님은 모르겠고 분위기는 좋은 때, 글방 선생으로는 좋은데 목사로는 부담스러울 때, 듣는 이야기로는 좋은데 말씀으로 받는 것은 꺼려질 때 이를 어찌 나 또한 붙들어 세울 수 있는 게 아님을 잘 안다. 그래서 같이 이겨내자, 곁을 지키고 같이 갈 테니 잘 모르겠거든 그냥 따라오자. 와 보라. 나의 심정은 안타까움이었다. 이를 어떻게 하여야 바로 알게 할까.
결단코 우린 모르지 않다. 돌이 아니다. 버려진 막대기가 아니다. 심지어 기계도 아니다.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 안에 싫어하는 마음 또한 그 증거라.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더 길게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구차해서 말이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것도 오게 하셔야 오는 거지, 깨우시는 이가 그 마음도 허락하셔야 일어나는 거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말이나 언어는 없다.’ 성경은 분명히 하신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끝까지 이르도다.”
조금 더 속내를 드러내서 나는 나의 한계를 인정했다. 내가 잘해준다는 것도 헛되고 서로가 위하고 의지한다는 일도 잠깐이라, 그러다 말면 그뿐인 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 지금은 어떤 필요에 의해 또는 서로의 고마움에 끌려, 편하고 위해 주니까, 하는 따위의 여러 이유와 이유가 겸하여져 따르겠으나! 네가 너의 하나님을 마주하고 고백하기까지 같이 가자.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다 알면서 외면하는 것이지 정말 모르는 경우는 없다. 더 두시는 까닭은 안 믿는 이들 때문이 아니라 믿는 이들 때문이시다. 나는 그리 확신한다. 지옥은 천국에 갈 자를 위한 것이고, 말씀은 들을 자를 위한 것이며, 주의 사랑은 바라고 또 구하여 얻을 자를 위한다. 바울은 이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들을 자가 듣는 게 복음이지 어디 보안이 잘 돼 있는 깊은 곳에 진열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나 들을 귀 있는 자의 들음이 복음이다. 악인들에게도 비를 내리신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이내 저 아이가 돌아서서 영영 외면하는 자리에 놓일지 돌이켜 주의 사랑 안에 거할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곁에 두시고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이 권하고 손을 내밀어 닿을 수 있는 지경이니 그 임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그래 맞다. 이는 임무이고 책임이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아이가 불쑥 공부를 핑계대고 숙제를 운운할 때 무슨 마음인가 알 것 같았다. 은연중에 싫은 것이다.
다 좋은데 예배가, 같이 어울리는 건 좋은데 말씀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싫은 것이다. 당연하였다. 아픈 델 건드리고 부끄러운 걸 마주하게 되고 싫은 걸 대면하게 하는 게 말씀이다. 이를 주 앞에 내어놓고 도우심을 바라는 게 예배다. 저가 다스리시는 일, 나는 없고 비로소 나의 주인이 주님인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기까지, 그 숱한 갈등과 싸움은 치열한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안다고 말해주었다. 그냥 편하게, 부담 갖지 말고 그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했을 때 우리의 관계는 되레 모호해진다. 내 마음에 두신 끌림은 금세 변덕을 부릴 것이고 서로를 향한 고마움은 부담이 되어 짓누를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게 죄다. 내 마음이 앞서는 것도 말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분명히 알게 하는 고백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모든 게 교만이다. 나는 아이에게 ‘안 돼!’ 하고 뿌리쳤다. 이는 내 안에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성가심에 대한 외침이었다. 나는 오만하다. 내가 아이를 건사해야 한다고 여길 때 마음에 이는 성가심은 분이 되고 화가 된다.
그래 맞다.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람이다. 아무리 비인격적인 존재 같다고 해도 인격적인 존재다. 사람 같지 않은 악한 사람도 사람이다. 동물 같다고 저가 동물은 아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이라 해도 돌이나 막대기는 결코 아니다. 우리 안의 원죄가 은연중에 하나님을 피하려는 것이다. 외면하고 나무 그늘에 숨어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하려 드는 일이다. 그러는 마음을 잘 안다. 한 번 외면하면 그 틈이 너무 멀다.
내게는 딱 십 년씩 걸린 것 같다. 예대 졸업하고 바로 신학을 하겠다던 마음이 87학번에서 97학번이 돼서야 신학을 다시 했다. 그런 게 또 외면하자 97학번에서 09학번이 되어서야 이른 셈이다. 이를 어찌 아이에게 말로써 보여줄 수 있을까? 단지 ‘숙제 때문에’ 그런 것으로 다음엔 절대 안 그럴게요, 하는 아이를 돌려 세울 말은 없었다. 안 돼! 그러다 누군 시집가고 장가가고, 소를 다섯 겨리나 사서, 밭을 새로 장만하여, 이유는 넘쳐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침 아이를 생각한다. 마지못해서 네, 하고 대답했으나 주가 이끄시지 않으면!
부디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 5:27-28).” 예수를 만날 수 있기를. 그러는 동안 부디 나의 마음은 감당하지 못할 일에 힘쓰지 않기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주께 두는 마음으로,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의지적으로 주의 품을 바람이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