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전봉석 2018. 4. 16. 07:07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복음 6:45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편 132:13-14

 

 

 

선하다는 것은 내 안에 두고 사는 것을 입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이는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그러므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내가 주 안에 거하는 것으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곧 주와 함께 사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후 13:3).”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이들이 오지 못해서 속상하였다. 아버지가 오셔서 함께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영성의 터’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이 터는 곧 그리스도 예수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그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은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 11).”

 

내 안에 드는 어떤 속상함도 실은 내 마음이기 전에 주의 마음이었다. 이 마음이 나를 수고하게 하여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굴게 하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곧 주의 마음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그러므로 내가 끙끙거리는 것이 마땅하면서도 옳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영성은 그 터가 그리스도시다. 주의 성품이다. 산상수훈의 말씀 곧 팔복으로 축약되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그 사역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이다(마 5:1-7:29).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리 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일이어서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내가 아이를 두고 저를 세례에 이르게까지 소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성결이다. 아, 그러기위해 우리의 마음 밭을 일구어 개간하는 작업이 필수였구나(13:1-39).

 

화전을 일구어 밭을 이루어가는 여정과 같은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복음이 뿌려지는 그 순간에부터 하나님의 작업은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3-4).”

 

그 또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주께서 행하게 하시리니 나는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주의 백성이 되고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28).”

 

그 각각의 길가 밭에서 돌짝밭으로, 가시떨기 밭에서 기어이 좋은 땅의 밭으로 이루어져 가는 일에 대하여.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곧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24-25).” 참깨와 들깨를 심고 보리와 밀을 재배한다.

 

이 모두는 주께로부터 나고 자라 열매를 맺고 곡식을 거둔다.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6-29).”

 

말씀 앞에 앉아 내 안에 두신 영성의 터, 그리스도 예수가 두시는 마음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었다. 결국은 마음의 욕심을 일깨워 이를 걷어내는 일이고 뿌리 뽑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향한 마음도 자칫 그것만으로는 나의 욕심일 수 있고 고약한 심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까지도 주의 것이었다. 그래서 ‘팔복’을 이루는 삶이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기필코 마음을 개간하고 다스려야 하는 일이다.

 

성찬에 참예하면서 그러지 못하고 있는 누구를, 아이를, 어떤 상황을 생각하며 속상해할 수 있는 것이 되레 복이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그것으로 이루어져가는 게 교회 공동체다. 가족 공동체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1-22).”

 

주가 택하신 일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3-14).” 주가 이를 원하셨다. 나를 여기에 두시는 것도, 변변찮아 고작 드려질 수 있는 게 하찮기만 하지만, 주가 택하시고 주가 자기 거처로 삼고자 하심이다. 주가 영원히 쉴 곳이면서 내가 여기 거주할 것으로, 이를 원하셨음이다. 내가 선을 이룰 수 있는 길이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오늘 나의 가난함이 복이어서 주의 나라를 받는다. 주린 영혼으로 주께 갈급함으로 배부름을 얻는다. 우는 자로 웃을 수 있는 것이고, 저들이 나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으로도 복이 있으니,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3).” 그 상은 아직 주어진 게 아니다. 이 땅에서 이루는 공적이 아니다. 오히려 얻었다 하면 그것이 화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

 

내 안에 안달복달 마음이 쓸리고 까여 시달림이 없다면 되레 무서운 일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 여기서 배부르고 지금으로 웃을 수 있는 것이 오히려 화로다. 아!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6).”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고, 아이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으로,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참 복이었다. 나는 가난하였고 애통하였고 온유할 수 있는 거였다.

 

그렇지.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33).” 아무리 해도 빛도 안 나고 오히려 갚음을 받을 수 없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자.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34).”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35).”

 

어디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이 불쑥 일었다가 도로 삼킨다. 아이가 괘씸해서 들던 서운함도 쳐낸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 그럴 수 없는 위인이었으나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 그럴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상황과 그 영혼의 믿음 없음을 두고 안타까워하자. 주라, 그리하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께서 내게 안겨 주신다.

 

곧 오늘 내가 세워가는 집은 신령한 집이라.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워갈 것인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워갈 것인가. 각각 공력을 나타낼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심을 바로 안다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나도 그러하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이는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4-17).” 말씀 붙들고 살자. 다른 데 볼 거 없다. 나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란 그럴 거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9-20).” 내가 이뤄가야 할 나의 남의 생의 사역이었다. 이로써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오늘 말씀은 들려주신다.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49).”

 

주께서 이루어 가실 것을,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 13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