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47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1-3
사함을 받은 게 많으면 사랑함도 많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1-42).” 마음이 우울하고 심란하였다.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게 아닐 거였다. 통화하기로 약속한 시간에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아이는 받지 않았다. 같이 읽기로 한 요한복음을 오전부터 펼쳐두고 있었다. 자꾸 어디가 아파 몸은 성가시게 굴었다. 한참 지나 오후에나 아이는 까먹고 있었다며 답을 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나는 난감하다. 쿡쿡 쑤셔대는 어떤 통증은 짜증만 난다. 드러누워 토라진 아이처럼 시무룩하였다. 정말이지 내 맘 같지 않다. 내가 애써 어찌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을, 매번 혹독하게 경험하면서도 속상하였다. 까먹을까봐 메모를 여러 곳에 하고 알람도 해놓고 아침부터 요한복음도 펼쳐놓고 있던 게 묵살된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와 그럼에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나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어쩔 수 없다는 말. 자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에는 자꾸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수단과 방법이 나를 괴롭힐 따름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또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지 다시 시도하며 일어서야 하는지. 나는 내 몸 어디를 쿡쿡 쑤셔대는 통증 때문에 더욱 예민한 하루였다.
아예 드러누워 병원에라도 가야 할 정도이든지. 적당하면서도 힘에 부치는 시달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오후께 아이들 학교 국어선생이 전화를 하였다. 모 대회 백일장에 나갈 수 있는 추천서가 필요한데 교육청으로부터 공문이 없던 일정이라 그리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별 것도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저에게는 책임이 따르는 일이겠으니. 뭐라 더 말할 게 없어서 또한 답답하였다.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고통을 매개로 살아간다.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것이어서, 내가 나서서 설명하고 설득하여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주께서 열어주시지 않으면 어찌 감당이 안 될 마음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죄에 대하여는 싫은 마음을 주셔야 한다. 죄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주인 됨을 말하는 일이다.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내 의와 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속상하고 답답한데, 그래서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에게 권하였다. 그저 모르겠다, 싶어 내버려두고 있으려고 하면 내 속이 탄다. 외면하려 들면 속이 볶여 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만 미우나 고우나 아름다움이란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일이지, 감상하는 정도의 무덤덤함이 아니었다. 우리의 연합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에 따른 근거를 영생에 둔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만 그러다 마는 아름다움은 세상 것이라. 이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돌아서기 일쑤다. 서로의 연합은 주의 성전으로 건축되어 가는 일이기도 하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그러게. 내가 그저 아이들 내면을 들여다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차원의 수고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또한 실망이 그래서 낙심이 생겨나도 바로 그 터에 세운 공적대로 갚아주실 것을.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나는 이제 아이들의 무기력증을 동정한다. 저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늘어져 처한 곳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그런 것이다. 스스로들도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주의 성령이 아니시면 어찌 해결이 안 된다. 나는 구하는 수밖에. ‘그의 경영은 기묘하고 지혜는 광대하시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9).” 무얼로 내가 가늠이나 할까. 나 하나 주체할 수 없어 쩔쩔매는 위인이, 내가 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내일이든 언제 점심나절에 통화하자. 답을 보내놓고 대꾸가 없는 아이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아이도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말이다. 주가 아니시면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라. ‘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23).” 그럼에도 ‘뿌리고’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24).” ‘추수하기까지’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28).” 주가 하셔야 될 일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처음 사람으로 죄가 왔고 마지막 사람으로 구원에 이른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두 사람만 지으셨다. 처음 사람으로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으며 마지막 사람으로 인해 주의 자녀가 된다.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마음 같아서는 실망과 절망뿐이지만.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3).” 그러니까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22).” 오히려 외면당하고 욕먹고 버림 바 되는 것이 복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씀 붙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 앞에 아뢴다. 나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 쌓여지는 선에서 선을 내는 일이겠구나.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그러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내가 날마다 말씀뿐이라. 먹고 마심이 이에 족하다. 어떤 불안으로 또는 몸의 통증으로 시달리면서도, 그래서 주님이라는 사실 앞에 안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주님 도와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에게 긍휼을 더해주세요.
입버릇처럼 나는 되뇌고 아뢰어 읊조린다. 이에 마음의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기까지.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떨어내야 할 것은 내 안의 근심이나 절망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수를 모색하려는 의도였다. 말씀만 붙들고 돌파하자. 혼자 되뇌었다.
아이 안에 거부감은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은 성령을 주셔야, 거듭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6).” 이는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45).” 허락하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의 자녀로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 사는 일이다. 아이는 지금 내게 맡기신, 주의 사랑을 확인하는 통로였다.
그렇지.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시무룩하여 화딱지가 나다가도 내가 더하면 더했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을. 나는 결코 의사가 아니지만 그 지경에 놓여 헤어나지 못하던 죄인이었던 것을. 이에 주의 사랑이 내게 과분하다고 여기는 만큼 아이들로 인해 드는 실망과 좌절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나는 더했다. 저들에게 빚진 자라. 그 사랑의 빚을 되갚는 일은 더욱 주의 은총을 바라는 일!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도 여전한 나의 됨됨이어서 주 앞에 직고하고 도우심으로 바라고 구하여야 할 것임을. 아, 이로써 궁극적인 곳은 하나님과 나의 연합에까지 이르는 일이었구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것으로 결국,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이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살아드리는 것이다.
나에 대한 권리를 모두 주께 향하여. 나는 늘 쩔쩔매고 고통당하고, 또는 마음이 심란하여 우울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리하여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주께 의뢰하며 고하여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11).”
그러므로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13).” 아, 그러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33:1).” 이는 곧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