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넓고 편한 길을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한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자가 많을 것이란 말씀 앞에 가만히 서본다. 노아의 때 같이, 방주가 닫힌 후에 많은 이들이 아우성하는 게 보인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 하는 말씀처럼 더는 어찌 손 쓸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인데.
이를 알고 바로 보는 눈이 복이 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그렇지. 이젠 보이고 들리는 이 놀라운 상황 앞에서 감사할 일이다. 다들 외면하고 뭐라 한들 들으려 하지 않는 때에도 무던히 주를 바라며 그 말씀을 좇아 살아갔을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와 같은 허다한 무리들이 있었다. 나만 왜 이러고 있나, 싶을 때.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저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바라보는 게 있었고, 저는 그 앞에서 기쁨이 달랐으며 그리하여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셨으니. 그래도 아이들이 좀 나왔으면, 그래서 보란 듯 우리가 일구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손위 처남 앞에 보여주고 싶던 마음이 있었다.
떨리고 주저하면서도 말씀으로 이끄시는 데 또한 놀랐다. 뜬금없기는, 사람마다 다 각자의 성향으로 주의 기질을 닮아가는 것이겠으니 내가 뭐라 할 건 아닌 거고. 어쩌면 나는 오롯이 주 앞에서의 나였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여느 때처럼 안정제를 먹었고 의식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그 또한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닌 다음에는. 아내는 이제 어른성도들이 와도 될 것 같다며 저 혼자 좋아라하였다.
내 안에 아무래도 평가를 의식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큰 교회를 다니는 이라 어찌 생각할까 망설이기도 하였던가보다. 나의 기도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예배가 드려지기를. 말씀이 선포되기를. 바로 그 순종에 대하여,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다시 말해서 내가 주도할 수 없는 나 자신인 것이다. 주가 만들어 가시고 이루어 세우신다. 예배에 나올 수 없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주께 아뢰며 그와 같은 안타까움으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내가 더욱 주 앞에 바로 서야 하는 이유이겠다. 내 마음을 아시오니, 내 뜻을 아옵소서.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그래 맞다. 내가 생각하는 훈련은 사람의 필요가 아닌 하나님의 필요로 생각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눅 12:30).” 그 다음에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었다.
내가 그처럼 생각하고 또 바랄 수 있는 게 내 의지의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늙으신 장모와 결의에 찬 손위 처남을 보며 여러 생각이 많았다. 지나간 생애를 돌아보며 오늘을 주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특권이었다. 이것으로 주를 보여주신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이를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나는 아이가 그래도 나왔으면 하였고, 다를 바 없이 나올 수 없는 저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공통분모가 있는 듯하였다. 자기 생각으로 주도하는 것인데 이는 환경적인 요인으로 자기 안에 고착된 오래된 죄의 근원이었다. 이럴 때 나는 다음 행동을 어찌 취해야 할지, 매번 당하는 일이면서도 어렵다. 그래 알았다, 하고 내버려둬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계속 권하고 또 이끌어야 하는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주의 마음이 아니면 그저 질리고 또 따분한 대상 아니겠나?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그런 와중에도 자기 생각으로 굳어져 가는 것이니. 어쩜 그럴까 싶게 아이들의 공통점이라, 때론 내가 이상한지 저들이 이상한지 구분이 안 된다. 아이들이어서 그러려니 하다보면 어른인들 안 그런가? 참 그 자기고집이란 게 죄의 근원이었구나. 어떻게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주의 도우심을 바랄밖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그런 자로 오늘에 나를 세우신 바, 부디 지치지 않게 하시기를. 좌절하여 넘어지지 않기를.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 13:18).” 주님은 천국을 가르치신다. 고작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가 그 가지에 깃드는 것. 또한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은 것. 보잘것없고 더디고 막연한 일 같으나 어느덧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겠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 오늘 말씀은 나의 사명이 소중하고 값진 것을 새삼 알게 하신다.
두려운 일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25).”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26-27).”
아는 체 해도 더는 알지 못하는 때가 이르리니, ‘나를 떠나가라.’ 버려둠을 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겠으니, 그래서 한 번 더 아이에게 권해보고. 그래서 다시 아이를 대하며 생각하기를 주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30).” 아직 끝나지 않은 길에서 나는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그렇지. 주가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오직 주 앞에서 정직할 수 있기를. 부끄럽게 여길 것은 아이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손위 처남에게 보란 듯이 누구도 나오고 누구도 나와서 왁자한 교회를 일궈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나의 속내다. 내 안에는 그렇듯 사람에게 보이려는 마음이 강하였다. 그래서 주눅이 들기도 하였다.
다들 돌아가고 녹초가 되어 있을 때 어떤 쓸쓸함이 어김없이 나를 엄습할 때, 나는 나로서 할 수 없어 더욱 처절하게 주 앞에 고하였다. 나 같은 사람을 어쩌자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것인지. 송구하고 민망하여 가슴이 다 먹먹하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을 들어 이런 귀한 사역을 맡기셨는데,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5).” 나는 주께 드릴 게 없어 빈 손 들고 엎드린다.
뭘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교회로 나올까. 돌아선 아이들의 마음을 어찌 붙들어 세울까. 나의 순종이 되레 고통이 되는 것 같으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이것이 또한 주로 인한 남은 고난을 짊어지는 것일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단지 내 신세한탄이 아니라, 내 안에 이는 이 억척스러운 슬픈 마음으로 주를 바라는 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나를 숨길 수 없어 주 앞에 엎드린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8-10).”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7-18).” 곧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