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1-32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시편 141:8
하물며 수명을 다 한 기계도 다시 쓸 수 있게 되니 기쁘다. 전날에 컴퓨터를 가져간 이가 10년을 훌쩍 넘긴 것을 다시 쓸 수 있게 고쳐주었다. 사람 관계도 그런 것이어서 먼저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였더니 그 가운데서 배운 게 있는가? 이래저래 마음이 풀어진 듯하였다. 중3 여자아이는 제법 얼굴이 밝아졌고 그러다보니 이제 객쩍은 소리도 곧잘 한다. 중2 남자아이는 심술이 단단히 나서 건드리질 못하게 구는데.
문득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는 말씀이 떠오른다. 괴테의 말처럼 ‘하나님은 늘 최후에 나타나신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 정작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었다. 어떤 선입견 또는 속단이 먼저 기대하게 하여 헛된 생각을 부풀렸다가 그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하게 하는 것이다.
중3 아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격려하는데 보면 그 생각이 내 것과 닮았다. 허황된 생각은 미처 따르지 못하는 의지 때문에 번번이 공염불이 되고 그래서 오는 실망은 공연한 핑계가 되어 다시 좌절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할 수 있는 걸 해! 나는 아이의 말을 끊고 답답하여 그렇게 일렀다. 당장 인문계 고등학교 원서도 써주지 못하겠다는 실정인데, 생각이 앞서는 통에 아이는 괜한 구실로 실망한다. 글도 안 쓰고 어떤 작가가 되겠다느니, 책도 읽지 않으면서 어떤 서재를 갖길 바라는 마음 같아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죄의 유형이다. 자기 좋을 대로 구는 것이다. 스스로 정하고 꾸민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 그리곤 뭘 할 만큼 했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있으려니 힘에 겹다.
이 가증스러움에 대하여 주의 마음은 엄중하시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5).” 특히 아이엄마들을 보면 그 단서가 짐작이 간다. 아이는 영혼이 병들어 힘들어하는데 엄마들은 피부가 까진 것으로 여겨 연고만 바르고 아스피린만 먹이려 든다. 어쨌든 성적만 잘 나오면 된다는 식이다. 아이의 반항이 괜한 게 아니라는 걸 어찌 말로다 설명할 길이 없다. 결국 중2 남자아이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인가?
아내는 포기하듯 아이엄마에게 그럼 다 그만두게 하고 글방엘 좀 보내보시라 권하였다. 낸들 어떤 뾰족한 수가 있어서는 아니고, 주께서 어찌 다루시려는가. 그 생각으로 그럼 그래보자고 하기는 했는데, 모르겠다. 정작 아이가 그렇게는 하겠다고 할는지. 할 수 있는 걸 해! 그렇듯 내가 중3 아이에게 해주었던 말은 실은 내게 들려주시는 주의 말씀이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돌아와서 보니 실은 내가 집에 돌아온 둘째이면서 집에서 불평하는 맏이였다. 내가 어떻게 떠났다 돌아오게 되었는지, 내 아버지의 은혜를 마치 나의 수고로 치부하며 새삼 누구를 탓하고 뭐라 정죄하고 있는 게 아닌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한 바 없는 사람이 누구에 대해 판단하고 비판할 때는 서슬이 퍼래 죽일 듯 달려든다. 참 못 됐다. 내 안에서 죄가 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오늘 본문의 맏아들의 특성이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못한다는 것. 아니 할 수도 없는,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내가 누구를 대하고 무슨 일을 접할 때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 내 입장, 내 의지였다. 이는 함정 같다.
그래서 오늘 시편으로 기도한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시 141:8).” 주께서 우리를 버려두시면 우리는 영락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결국 떨어질 대로 떨어져 최후에 이르러서야 주를 찾는 경우에 대하여, 무서우면서 두려운 일이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눅 15:16).” 처참하게 무너져야 비로소 아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그래서 주께 고한다.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시 141:9).” 그렇지 않으면 번번이 넘어지고 쓰러져 저의 올무에 걸려 죽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아이들을 대하면서 그게 결코 저 아이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것을 생각하였다. 늘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신기하다. 아이엄마는 믿는 이였다. 믿음을 저버리고 남자를 만났고, 살림에 쪼들려 주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 몸살을 고스란히 아이들이 지고 간다. 무슨 공식 같다. 이상하다 싶어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십중팔구 아니나 다를까 영락없었다. 죄의 첫 발은 의심이다. 하나님이 정말 그러셨나? 그렇게 하시려고?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의심이 들어오면 달리 보이는 법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새삼스러운 것. 죄가 들어오면 누가 하나님에 대해 뭐라 말해도 개의치 않는다. 별로 마음 쓰이지 않고 저의 부정적인 언사를 개의치 않는다. 뭐라 하든지 하나님과 자신을 별개로 놓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중3 아이와 얘기하면서 어떤 두려움이 들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 내가 주님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하면 어쩌나?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 22:54).”
그런 거다. 틈이 생기면 곪게 돼 있다. 나의 주인은 주님이심을,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이를 잊으면 영락없다. 지나고 보니 돼지우리였다. 내 입에 구겨 넣고 있던 게 돼지 먹이였다. 처량한 신세로 떨어졌는데도 누군 돌이켜 아버지의 집을 구하고 누군 끝내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으니.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한 영혼에 대한 주의 간절함은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8).” 구체적인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
내가 아이와 씨름하다 어떤 노여움이 또는 짜증이 나를 몰아칠 때 내가 고약한 맏아들처럼 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죄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4).” 결국 밖에서 주저하며 화를 내던 맏이에게도 아버지는 찾아오셨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28).” 내 마음이 이는 어떤 불편함이 실은 여전한 나의 본성이었구나. 객쩍은 소릴 해대는 아이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있는 나였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32).” 저는 과연 아버지의 말씀에 순응하고 아버지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을까? 아니면 이내 골 부리며 여전히 바깥뜰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서러워하고 있을까? 나는 주께 기도한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시 141:8).” 하루에도 빈번하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마음에 대하여.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