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20:38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하나님에게는 모든 자들이 살았느니라.’ 그런데 죽은 자들이 있었으니, 고의적으로 주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이에 내버려두심에 대하여, 그 상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날들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 드러나는 현상이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어서 이를 알고 주께 의지하는 게 복이었다. 곧 그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
모르거나 부인하여 주를 거역하는 일에 대하여는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인데, 다음 주일의 말씀이 이어져 그 의미를 일찌감치 묵상할 수 있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롬 2:17-18).” 그리 산다고 자부하고 여겨 그리스도인이라,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19).” 그리 살아야 하는데?
진리의 모본을 가졌으면서 어리석은 자로 사는 경우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20-21).” 결국 내가 나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야 어찌 그 죄가 배나 되지 않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 말씀을 대하였다. 내 의지와 힘으로는 나를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해야 하였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습 3:11).” 주가 이루실 일이다. 내가 누구를 대하고 생각하는 일에서도, 나를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주일 예배를 마치고 조금은 심심하였고 심드렁하여 누웠다가 다음 말씀을 읽으며 위로와 새 힘을 얻은 것이다. 주의 거룩한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데 안도한다. 그리하여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나로 하여금 믿는 자의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 사명이란 남은 자로서 더는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두려울 게 없는 자로 세우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13).”
왜 그러실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두 번째는 그 뜻을 알게 하셨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2:18).” 세 번째는 이로써 그것을 의지하게 하신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17).” 말씀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자랑함으로 선한 것을 분간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특권이 오히려 교만하게 하여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드러나서야. 스스로 옳다 하는 삶을 살아가서야.
결국 우리의 사명은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19).” 앞을 보지 못하는 이를 인도해야 한다. 곧 어두운 데서 빛으로 사는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런데 이 귀한 사역을 ‘스스로 선생이라 믿었으니’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0).” 교만함이란 남은 가르치면서 나는 함부로 구는 일이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21).”
오후께 딸애는 밀린 방송을 보며 리포트를 썼고 아내는 돌아가 중2 아이들 다음 날 시험공부를 시키느라 자리를 비운 가운데, 읽는 말씀이 죄다 내게 하시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더하신 은혜를 특혜로 삼아 교만한 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 나오고 못 오는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애통해하는지. 그런 내게 향하신 말씀이라.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
그렇구나. 오늘 날 교회 때문에 하나님이 모독을 받으신다. 믿는다는 자의 소행으로 교회가 욕을 먹는다. 그에 따른 경고의 말씀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겔 5:5-6).”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오늘 말씀 앞에 멈칫한다.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자를 향한 말씀이 아니다. 믿지 않고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영혼이 죽은 자를 향한 말씀이 아니다. 이에 내가 해야 할 마땅한 기도를 들려주신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대하 6:32-33).”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다 중2 남자아이들을 만났다. 시험 끝나고 글방에 오겠다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힘내라고 말해주었다. 다들 짜증이 그 얼굴에 가득했다. 하긴 좋은 게 너무 많은 세상이다. 온통 게임 천국이다. 무료로 앱을 깔면 언제 어디서나 별개의 세상이 펼쳐진다. 애고 어른이고, 굳이 현실을 딛고 살 일이 없다. 하나님을 바라고 구할 필요가 없다. 당장 그 즐거움에 만족할 게 널렸다. 모두가 꿈이 없다. 장래희망이란 게 없다. 목적을 잃는 삶이다. 꾸역꾸역 산다.
그런 아이들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를 알게 하는 것이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저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알게 하여 그 삶을 소중히 값지게 여길 수 있게 한다면, 함께 주를 바라며 의지하며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애달픔으로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한참 그럴 때이지만 저절로 낫는 병이 아니었다. 나를 오늘에 여기에 두시는 이의 뜻이 분명하였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사 26:18).” 더는 들으려 하지 않고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두고 생각하면 속만 상한다. 그러려니, 그럴 수밖에 없으려니, 그 또한 겪어야 할 시기이려니 하고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다 먹먹해져서, 생각하기조차 그치지 않고는 마음이 어려워서 말이다.
그런 가운데 과연 그럼 우리는 안 믿는 저들보다 나은 게 무언가? 내버려두심 바 그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보다 주 앞에 온전한 게 무언가? “내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네게 벌을 내린즉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네가 수치와 조롱 거리가 되고 두려움과 경고가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5:15).” 이보다 못한 삶이 또 있을까? 그게 뭔지 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더는 나를 믿는 자로 여겨주지 않는 데 따른 상실함이란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그저 우스운, 한심하고 처량한!
로마서 2장을 읽으며 결국 믿는 자로서 바로 살지 못할 때 오는 경고의 소리를 들었다. 오히려 교만하여서 결국 안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욕이 되는 경우에 대하여. 나는 속상하였고 두려웠고 혹시 내가 그러하지 않은가,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숨이 깊었다. 오히려 내가 더 나쁠 수 있다.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하였으므로 네 모든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겔 16:51).” 내가 저들 앞에서 참된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의 결과다.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유리하게 판단하였은즉 너도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네가 그들보다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이 너보다 의롭게 되었나니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은즉 너는 놀라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52).” 두려운 마음으로 다음 말씀도 찾아보았다. “네가 교만하던 때에 네 아우 소돔을 네 입으로 말하지도 아니하였나니(56).” 곧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61).”
묵묵히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어도 주 앞에서 몸부림치는 일이다.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죄인이라. 이를 느끼고 깨달아 예민하게 반응하며 사는 산 자의 날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이를 두고 괴로워할 줄 아는 게 다행이었다. 곧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그렇지.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2).” 그러므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3-4).” 허망한 것에 소망을 둘 게 없었다. 오직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6-7).”
이에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