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1:19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편 147:3
누구를 뭐라 할 게 아니다. 그 정죄함으로 내가 받는다. 뭐라 한들. 아이라도 스스로 순종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우린 모두 진노 아래 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이리저리 마음을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이는 그저 아이다웠고 아이엄마는 그저 이기적이었다. 더는 마음을 두지 말자. 애쓰지 말자. 하고 돌아앉으려니까 내 속이 탄다.
이건 또 왜 일까? 우린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이다. 그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18).” 진리를 막는 우리의 불의 때문이다. 경건하지 않음으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 그런데 이를 부정하고 외면하려 드니 그 한계가 뚜렷하다. 더는 어쩔 수 없는 자리가 코앞이다.
어떤 우울함이 하루 종일 엄습했다. 어디로든 가고 싶은 마음에 좀이 쑤셨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과 여의치 않은 몸과 생각 같지 않은 마음이 한데 뒤섞여, 조용한 오후를 닦달하고 있었다. 누구에 대해, 어떤 일에 대해 뭐라 생각하다 다를 바 없는 나를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아, 내게 주어진 한 날의 값이 귀하구나. 누구를 또 한 아이를 생각하며 애쓰고 마음이 쓰여 안타까워 할 줄 아는 것도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겠구나. 그리하여 우울하면 또 우울한대로, 그렇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오늘 말씀 앞에 앉는다. 인내는 이것이니,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 그러므로 오늘 내가 느끼는 환난은 무작정 거부할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아내는 점심을 먹으며 어느 아이 이야기를 했고 그 아이엄마의 몰염치로 치를 떨었다. 엄마들의 경우없음과 이기적인 것이야 하루 이틀 겪는 일은 아니었으나 좀 너무하다 싶어 나 역시 화가 났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인내를 이루자. 참자. 아이가 그만뒀다, 없다 생각하자.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심는 원리다. 저를 이해하고 받아 감당하는 일을 오늘 우리에게 두신 것이라면, 그래,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4).” 우리의 수고가 전부에서 나온다.
가진 게 많아 여유로운 가운데 덜어주는 것에 대하여. 쓰다가 또는 팔다가 남은 것으로 남을 구제하고 것도 생색을 내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일에 대하여. 헌금도 궁색한 마음으로 아까워하는 것으로 드리는 일에 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도 저에게 더는 돌려받을 수 없는 것으로 선히 대하는 게 복이 있나니. 나는 아내의 마음을 위로하듯 주저리주저리 말하다 그게 다 내게 향하신 말씀인 것을 새삼 들을 수 있었다. 돈을 생각하고 어떤 성의나 존중을 바라는 마음으로는 아이들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할 수 없다.
정말이지 이상한 애들만 보내신다. 지겨울 정도로 그 엄마들의 행세는 서로 닮았다. 어쩜 다들 몰염치에 몰지각함이 똑같은지. 없다 생각하고, 죽었다 생각하고, 묵묵히 무던히. 인내를 이루라, 하시는 오늘 말씀 앞에 앉는다. 이 마음을 주가 아신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 147:3).” 주밖에 나의 마음을 뉘 알아주리오. 저는 다 아신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4).”
그러므로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눅 21:8).” 온통 말들이 많다. 내가 애쓰고 궁리해도 될 일이 아니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란 온 세상을 맞서 상대하는 것과 같다. 저는 저의 전부를 가지고 덤비는 것이다. 어릴 때의 상처와 그 안에 쌓인 두려움과 미움과 시기와 방종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외면하는 고집스러운 죄악으로 다가온다. 저를 상대하기 쉬운 때는 같이 악으로 깡으로 대하는 일인데!
말씀은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내 안에 이는 온갖 판단과 그에 따른 업신여김과 정죄함에 대하여, 용서하라. 그러므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니,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주의 기도를 함부로 읊조리곤 하는지 모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고 부르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고 있나? 하늘로 받들어서 그 섬기는 마음이 진실한가?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는 돌아서서 얼마나 함부로 거룩을 훼손하며 살고 있는지. 나라에 임하옵시며, 한데 정작 내 안이 주의 나라가 아니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면서도 내 뜻과 내 의를 먼저 구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나 더 넘치게 또는 과하여 버려지는 게 더 많은데도 더 많은 것을 탐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말로 나는 어쩌면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 이는 어떤 미움을 또 서러움을 과연 날마다 사하여 주며 살고는 있는지. 결국은 사하여 준 것 같이 사함을 받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하면서도 늘 스스로가 시험이 자신의 영혼에 시험이 되는 판국이니.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한데 늘 머물고 즐기며 기웃거리는 게 온통 악한 세상에서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면서 과연 나는 온전히 아버지를 바라며 살고는 있는지.
오늘 말씀은 이를 언급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눅 21:14).” 늘 마음에 변명거리를 안고 사는 삶에 대하여, 그 억울함을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일에 있어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28).” 주의 속량이 아니고는 해결할 방법이 내게는 없다. 아내는 감기로 힘들어 하면서도 중학교 아이들 시험 때라 더 고단하고 힘든 한 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느라 이런저런 서러움과 마음에 이는 어떤 원망을 푸념처럼 늘어놓았고, 나는 점심을 같이 먹으며 인내를 말해주다 글방에 돌아가 내가 우울하여 겅중거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음이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4).” 설마, 하고 자신을 두둔하며 방심하였다가, 아뿔싸! 날마다 아무 생각 없이 주절거리듯 되뇌던 주기도문이 오히려 나의 족쇄가 될 수 있겠구나. 정녕 주 앞에 드리는 기도란 나의 변명이나 궁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다 그릇 행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주가 아니시면 단 한 시도 살 수가 없음을.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 21:35).” 그래서 말씀은 이르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곧 주께서 이루신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 147:3-4).” 주가 다 아신다. 내가 아이로 인해 실의에 빠지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오늘에 처한 것을 다 그 이름대로 부르신다.
날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로 내려가는 중이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5-16).” 같이 가시는 주님을 왜 자주 놓치는 것일까? 그런 내게 주님은 실제의 실재로 계신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9).” 막연한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다. 우리가 아이를 대하고 그 부모를 상대해야 하는 일은! 한 영혼을 두고 마음을 같이 하는 일은! 실재의 대상, 주님은 내게 손을 내미신다. 발을 보이신다.
나를 만져보라. 그리고는 일러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42-43).” 실전에 놓인 날들이다. 구상과 막연한 생각으로 다짐하고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맞닥뜨리고 불편함으로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도로 삼키면서도, 스스로 인내를 이뤄야 하는 일이다. 주만 바라고 산다는 일은 결코 고상한 똥 폼이 아니다. 허세가 아니다. 위선일 수 없다. 내 입에서 늘 악, 소리가 나는 일이다. 꼴 보기 싫고 더는 상대도 하기 싫은 위인에게, 주님은 같이 동행하게 하신다. 그 손과 발을 마주대하게 하신다. 먹을 걸 나누게 하신다. 실존의 실재의 실제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시 147:6).” 주 앞에 엄연하기를,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7).” 결코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