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전봉석 2018. 5. 2. 07:20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누가복음 22:35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편 148:13

 

 

 

아이를 오지 못하게 하고 와도 그냥 돌려보내달라고 하였다. 아이엄마의 말에 아내는 한숨이 깊었다. 그래도 와도 되죠? 하고 묻는 아이의 편에 서라고 말해주었다. 굳이 두 사람 중에 한쪽의 손을 잡아야 한다면 우린 언제나 아이 쪽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의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생각하였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앞서 주님은 말씀하시길,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17-18).”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아이가 안 오겠다면 모를까, 온다는 걸 그 부모의 겁박으로 인해 막을 수는 없었다. 더는 교육비를 내지 않겠다는 말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우리도 감당하기 힘들 일이었으나, ‘그런 아이를 우리에게 맡기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하자고 말하였다. 내가 맡은 게 아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이는 주님이시다. 내가 고르고 찾아온 게 아니다. 내가 값 주고 산 게 또한 아니다.

 

좀 더 솔직하게 들어가자면 지겹다. 신물이 난다. 아이엄마의 몰지각함이야 그렇다 쳐도 아이들의 되바라지고 능청스러움에 진저리가 난다. 아내는 솔직하게 말하였다. 돈만 아니면 내가 이 짓을 왜 하겠어?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이 우리에게 돈이 또한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돈에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이처럼 굳이 아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씨름을 했을까? 그래서 우리의 쪼들리는 가난으로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구나. 돌아앉으면 신물이 올라와도 꾹 참고 또한 아이를 아이엄마를 상대하는 일이었으니, 주의 마음을 달라고 빌자.

 

주의 사랑이 아니면 싸가지 없는 아이와 돼먹잖은 그 부모의 몰지각함을 어찌 감당이나 할까? 그것으로 우리가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이었다. 나의 신경증이 오늘에 나를 혼자 두고, 할 게 없어서라도 말씀 앞에 앉히시고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이를 두고 주께 바라고 구하게 되는 게 아니겠나? 전에처럼 어디든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다면, 나 잘난 줄 알고 뭐라도 거침없이 일을 시작하려 하였다면, 과연 나는 지금 여기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기나 하였을까?

 

안 되지. 안 되니까 우린 그저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뿐이야. 아내에게 해주었던 말이 고스란히 내게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이었다. 우리가 언제 먹고 살 궁리를 위해 이 일에 뛰어든 것이던가. 우리 형편이 좀 나아지길 바라서 교회를 지키는 것이겠나. 어쩔 수 없다는 말, 어쩌면 이것보다 더 좋은 수단이 또 있을까? 안 그러면 우리가 언제 이처럼 주를 바라며 주의 도우심으로 살기를 바랐겠나. 아내는 아이엄마의 연락을 듣고 어처구니없어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두시는 아이라면 거저해도 마땅할 것이었다.

 

오늘 말씀을 그렇게 다시 읽는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22:35).” 이제는 사야 한다. 가져야 한다. 놓지 말아야 한다. 이를 역설적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두 말씀을 한몫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앞서 전대와 배낭과 신발은 주의 강권하심으로 없이도 부족함이 없었다. 신학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내 돈 들여 학비를 내지 않았어도 되고, 그러느라 수고하여 그 몫을 구할 필요도 없이 채워주셨다. 한데 이제는곧 주의 성령으로 이 길을 가는 데 있어 전대도 배낭도 검도 겉옷을 팔아서라도, 성령의 검을 사야 한다. ‘내 양을 치라.’ 그러자면 굽히지 말아야 할 때가 있어 낙심도 허비라. 남이 내게 띠 이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감을 받는 일이다. 다시 말해 더는 내 일이 아닌 것이라. 내 양이 아니다. 주님의 양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4:1).” 저들로 책잡힐 것 없다. 저들 말에 휘둘린 것도 없다. 우리가 맡은 아이들은 또한 저들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할 것은 충성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주만 바라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함이다. 내 안에 이는 온갖 서러움이나 억울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한심스러워서 주를 바란다.

 

아내와 점심을 먹으며 심음의 바른 원리에 대하여, 아침에 묵상하였던 말씀을 근거로 말해주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21:4).” 우리는 없어서 전부를 주께 내어놓는다. 있어서 그리 못하는 게 축복일 수 없다. 나누고 계산하여 이리저리 따져서 그나마 시늉이라도 내는 것으로는 전부일 수가 없다. 아이를 대하는 마음도, 너무 싫고 짜증스럽고 싸가지 없는 것이라 나부터 걷어치우고 싶지만.

 

그래도 와도 되죠? 하고 묻는 아이를 어찌 오지 말라고 할 것인가. 살기 싫다는 말을 하는 아이에게, 설령 그 말이 엄살이고 뻥치는 소리라 해도 우린 그저 또 속아주는 게 일이지 않겠나. 모르겠다. 저들은 얼마나 풍족한 가운데서 주께 바치며 사는지. 우리는 그 가난 중에 자기의 전부를 내어드리는 삶이어야 한다. 온전히 주께 내어드린다는 일은 말이다. 그저 이게 돈 때문에 이러는가, 하는 환멸과 역겨움까지도 주께 내어놓는 일로써 주의 마음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주가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그저 묵묵할 따름이다. 너무하다 싶은 이를 미워하지 않게,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은 것을 마다하지 않게, “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148:13).” 더 좋은 수단은 없다. 이게 그래서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에게 맡기신 일인 게 분명한 것이어서.

 

하루에도 열 두번씩 신물이 올라올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주께서 기도하셨다. 내 할 일은 형제를 굳게 하는 일이다. 자칫 멀찍이 따라가서는 영락없다. 결코 나는 의인이 아니다. 저들과 다를 바 없다. 되레 더 추하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나와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여길 때 여지없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2-3).” 이를 잘 알기에 주를 바란다. 주만 바란다. 내 신념이나 굳은 결심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의 다짐과 각오로도 어림없다. 돌아서면 미움이 토악질처럼 쏟아진다. 저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한다.

 

,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53:1).” 그러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서 내 안에 부패와 가증함이 없던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2-3).” 이와 같은 시인의 고백이 오늘 나의 것이구나.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 주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이유다. 두 손 들고 주께 나아가는 이유다. 나는 나로 나를 어쩔 수가 없어서, 아내에게 그리 말해주면서도 내 안에 더 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가득하여서. , 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을.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지금도 다를 게 없어 주 앞에 고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4-7).” 나의 허물과 죄에서 날마다 구원하며 살리시는 주님이 아니시면 단 한 시도 온전할 수 없음을. 주의 자비하심으로 이제 우리에게 그 풍성하심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이런 아이들을 보내시고 저런 아이엄마들을 마주하게 하시는 것을, 비로소 내게 더하신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무궁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심이었다.“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148: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