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전봉석 2018. 5. 4. 07:21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48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잠결에 징, 하는 알림 소리에 깼다. 열두 시 이십 분. 아이가 카페에 글을 올렸다. 얼결에 카페를 열고 아이의 글을 확인하고 대충 훑어 읽었다. 뭉크의 <절규>를 본 듯 내용이 강렬하였다. 돌아누웠다가 다시 열어보려는데 그새 아이는 글을 지웠다. 아빠에 대한 원망과 아빠가 믿었던 아빠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서러움이 기억에 났다. 자신에 대한 환멸과 그것으로 모멸감을 느끼는 듯한 내용이었다. 뚜렷하게 두 번째 단락 첫 마디가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며 어떤 괴로움을 적어 내려갔던 것이다.

 

좀 더 기다렸다가 다시 열어봐도 아이의 글은 지워진 채였고, 다시 글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잠이 싹 달아났다. 뒤척거리며 나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에 대한 어떤 기대랄까 또는 희망을 접어두려 하고 있던 걸 그리 깨워서 다시 일구시려는가. 그냥 잠결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정말 아이가 그런 내용의 글을 올렸었는지, 순전히 나의 착각인지. 나는 끙, 하고 돌아누우며 확신할 수 없었다.

 

회의하는 마음에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하는 오늘 아침 말씀이 나를 붙드신다. 내 안에 불쑥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하는 말씀을 놓고 주께 향한다. 분명히 보았다. 아빠에 대한 어떤 원망과 서러움을 고스란히 아빠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외치고 있었으며, 자신이 느끼는 자신에 대한 환멸과 그 지겨움에 대하여 아이는 절규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 복사를 해둘걸. 아니 처음에 좀 더 꼼꼼하게 읽을걸. 너무 잠결이라, 나의 이 엉터리 태도에 화가 난다. 분명한 건 아이가 두 번째 단락에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며 그 지난한 고통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 같이 허술하고 한심한 인간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맡기신 것일까? 늘 그렇듯 오전에 노인이 건너와 차를 같이 하였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요는 날씨가 너무 좋은데 늘 들아 앉아 있으니 당신이 나를 태우고 어디 좋은 데 가서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거였다. 왔다 갔다 한 시간 거리라며 운을 떼는데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아이들이 일찍 수업을 온다는 핑계를 댔다가, 속이 좀 안 좋다는 핑계를 댔다가. 노인은 나의 뜬금없는 거절에 다소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니 더는 감출 수 없는 일이라 사실 내게는 불안장애가 있고, 그래서 어딜 자유롭게 나갈 수 없고, 누구랑 같이 움직인다는 게 어렵다는.

 

그와 같은 설명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노인은 전혀 그런 걸 몰랐다며,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건물 근처 가까운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기로 했다. 그래놓고는 열두 시가 되기까지 화장실을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그냥 편하게 같이 그러면 될 걸, 나도 그러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같이 식당엘 가서는 얼마나 빨리 짜장면을 먹어치웠는지, 노인은 걱정을 하였고 그제야 내가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어렵다. 나는 내게 맡기신 내가 너무 어렵다.

 

같이 돌아와 민망하기고 하고, 송구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아침마다 나는 저와 차 한 잔을 하기에 앞서 느닷없는 그의 방문 전에 꼭꼭 화장실엘 가야 한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저의 아내도 젊을 적 언제 정신과 치료를 받았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내색을 않고 있던 내가 혹시 본의 아니게 불쾌함을 더하지는 않았을지. 또는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가, 어쩐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안쓰러워는 것도 같았고.

 

종일 마음이 침울하였다. 아이들이 왔을 때도 뭐라 할 기력이 없어 같이 책을 읽고 탁구를 치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었다. 앞서 저 아이에 대한 마음도 슬그머니 물러나 앉으려는 듯 이제는 발을 빼고 있는 마음이었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나더러 뭘 어쩌라고 이러시는 것일까? 함부라비 시대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그렇듯 믿을 수 있었을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구약의 저들은 예수 이전의 사람들이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0-31).”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야말로 신비로운 게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의 고백으로 믿습니다, 하는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데, 믿기지 않는데 믿을 수밖에 없는, 믿어지는 믿음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강권하심이 아니고는. 누구는 믿고 누구는 끝내 믿을 수 없었던, 내가 이해하는 그 너머의 믿음에 대하여 나는 사실 잘 모른다. 이해가 안 간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를 예언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그 자손에 의한 복의 근원에 대하여,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천 년 전에 아브라함은 믿고 붙들고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 자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말씀이 완성되어 성경이 있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그러니 얼마나 큰 특혜를 받은 것인지. 과연 저들은 어떻게 말씀으로만 말씀을 믿을 수 있었을까? 안 믿는 아이들이 오히려 당연하다. 교회를 권하고 예배를 바랄 때 이를 거절하고 멀리하는 게 마땅하다.

 

말씀을 붙든다는 건 약속을 의지함이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 나 같은 이를 뒤늦게 불러 세워 어릴 적 일찍이 부르시고 약속하였던 그 일, 주의 길을 가게 하시는 데 있어 나는 그의 강권하심으로 공황장애를 안고 살고, 이처럼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다고 이해한다. 나의 신경증은 나의 고약함과 비례하는 것이다. 더는 안 되겠으니까, 이렇게 하지 않고는 말을 듣지 않으니까. 야곱의 골반을 치셨던 이가, 모세의 혈기왕성함을 무력과 의기소침함으로 다스리신 이가, 기어이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신 이가.

 

나는 노인에게 이 일이 언제부터인가 말할 때 십년쯤 되었다고 말하였다. 기어이 다시 신대원을 시키시고 꿇어앉혀 목회 일선에 놓으시던 때, 만약 그렇지 않으셨다면 나는 다시 하다 그만두었을 테고, 오늘에도 하루에 수골백번씩 엠마오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붙드시는 데 있어, 그 증표라. 내가 저 아이를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먼저 마음을 거두려고 할 때 뜬금없는 아이의 글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알 수도 없게 순식간에 올려졌다가 내려진 것을 두고. 과연 나는 다음 행동을 어찌 취해야 옳은 것일까?

 

요지경 속인 세상에서 나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저들에게 말한들. 믿음이란 그처럼 농밀하고 내밀한 것이어서 떠벌인다고 증거가 되는 게 아니었으니, 묵묵히 주어진 생을 다하는 것이다. 더는 돌아설 수 없게 하시는 이가 복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나를 붙드신 이가 의로우시다. 마음이 침통하고 괜히 서글펐던 하루였으나, 그래서 돌아와 저녁예배도 드리지 않고 시무룩하니 누웠다가 일찍 잠이 든 것이었는데. 아뿔싸. 하나님은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나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아이를 두고 주께 빌고 또 빌었다. 19점, 30점. 아이의 성적은 형편없었고, 고착된 아이의 바닥은 스스로를 환멸하게 하기에 충분할 거였다. 언니와의 반목과 그 부모의 어중간한 관계와 자신의 애매모호한 처지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웃자니 슬프고 울자니 웃기는 세상에서 뭘 어찌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소린지. 어른들의 간섭과 억압이 어줍기만 한데, 스스로는 자신이 한심할 뿐이고. 그 잘난 아빠의 하나님은 대체 뭐 하는 분이기에 이 모양을 만들어버린 것일까? 하는. 잠결에 읽은 아이의 글을 열심히 떠올리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연신 주의 이름을 불러대면서. 나또한, 대체, 하나님은, 왜!

 

그렇게 밤을 샌 것인지 선잠을 잔 것인지, 잔뜩 피로감에 눌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은데.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아, 주님! 이걸 스스로 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회의한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이른 것이고, 성경을 잘 알고 믿는다고 믿는 이들도 자신의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였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좀 나은 인간이나 더 악한 인간이나 똑같은 죄인이라. 누가 감히 스스로의 구원을 자부하고 확신하며 그따위 신념으로 하나님의 뜻을 들먹거릴 수 있을까?

 

산 자의 하나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오늘 내게 호흡을 두시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은총이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 막연하고 때론 누구보다 더 의심이 많아 주의 손과 발을 만져보고도 의아해하는 사람이지만 이로써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고통이 나의 호흡을 입증한다. 나는 매순간 엠마오로 내려가지만,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 24:13-14).”

 

그때마다 순간 ‘그인 줄 알아보게 하시는 주님’,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1).” 그리하여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시고,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늘 보면 뒤늦게 깨닫는 게 나의 연약함이 아니겠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 내 안에 이는 의구심에도 다시 일으켜 앉히시고 실제의 삶으로 찾아오시는 주님,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42-43).”

 

먹고 마시는 일 가운데 함께 하신다. 그러니 내 일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53).” 다른 더 좋은 수를 나는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궁리해도 모르겠다. 내가 아이를 두고, 저 노인 앞에서, 누구로 인해, 어떤 문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럼에도 주가 함께 하심에 대하여.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시 150:2).” 곧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 그리하여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