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전봉석 2018. 5. 12. 07:19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32, 3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누구를 생각하고 위하여 섬기는 일이 허비가 될 수 있다. 연민이 또 어떤 감상이 나를 사로잡을 때, 그 배후의 하나님을 온전히 먼저 생각하지 못할 때 말이다. 그래서 선을 행하고 의를 구하는 이들도 많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때가 더 많은 것이다. 체육대회가 끝났다며 친구들과 놀다 아이가 말도 없이 들렀다. 안경을 벗고 책을 읽고 있다가 나는 헛것을 보았나했다. 그만큼 외롭고 그래서 좋은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 반팔 반바지차림이어서 내 카디건을 주어 입게 하였다.

 

마음이 쓰이고 그리 여겨지는 데 있어 그것이 그저 ‘선한 사마리아인 콤플렉스’로 그쳐서는 안 된다. 아이는 많이 밝아져서 이젠 제법 농담도 하고 너스레도 떤다. 주일에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으면, 하고 주께 아뢰었다. 나는 지난 번 아이에게 거절당하고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영혼을 생각하지 않는 선행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때 마침 군에 가 있는 녀석이 문자를 주어 이번 주일에 와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여, 한껏 좋아라하니까 그걸 보고 곁에서 아이가 의아해하였다.

 

‘이번 주일은 지키러 가겠습니다.’ 아이의 표현이 흡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또 기도하는 것뿐이어서,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8).” 아이가 주일에 온다니까 갑자기 환해지는 마음을 나 또한 의아하게 여겨졌다. 아이 앞에서 으스대는 것처럼 말이다.

 

곧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그렇구나. 주의 간구로 내가 사는 것이었다. 나의 간구로 저를 생각나게 하시고 마음을 쓰게 하시더니, 그 신경 쓰이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거였다. 이로써 주를 닮게 하시는 바,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이를 맡아 지키고 순종하는 삶이 귀하였다. 잠옷 차림으로 온 듯 한 아이에게 겉옷을 입히고, 다시 또 주일을 권할까 망설이다 다음 날 백일장에 나가기 위해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겠으니 그때 말해야지, 하고 혼자 생각하며 그저 아이 등을 토닥거렸다. 마치 이런 느낌이랄까? 요즘 글씨를 쓰는데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처럼 기계적인 문자와는 달리 느낌에 따라 자음과 모음을 흘렸다가 모으기도 하고 길게 늘였다가 끊기도 하면서 그 뜻을 헤아려내는 일이 꽤나 집중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듯 말씀이 나를 토닥거리시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자유, 예수를 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는 일이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럼 다른 게 의미가 없어진다. 더는 신경을 빼앗기지 않는다. 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면 이 말의 뜻이 선명하다.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 1:2).” 다른 위로는 모두 거짓이었다. 한때였다. 숱한 연애감정처럼 순간 불 일 듯하다, 십일 홍이라. 붉은 꽃은 길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고 또 누구를 마음에 두고 주께 아뢰는 일은 그러므로 조급한 게 아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 나의 주님이 나를 이렇듯 새 사람이 되게 하신 데 대한 그 가치와 기준은 엄연히 다른 게 되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내가 떨치고 일어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요 8:32, 36). 혹은 애착을 갖고 미련을 두고 산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이는 주가 나를 생각하심이다. 그 사랑이 참으로 지극하여 마침이 없으시다.

 

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돌아보면 죽어 마땅하고 그 어떤 값을 치러도 다 갚을 수 없는 곳에 대하여, 자유함이라니. 이 자유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리 여겨주시는 의. 죄 없다 인정하시는 선.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를 내가 어찌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를 알게 할까? 결국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거룩이다.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로움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이를 생각하는 일은 참으로 가증되고 사소한 일일 것이나, 그렇지. 나의 그 사소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별 수 없는 나의 마음 씀이 그저 헛되지 않기를. 아이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그저 나의 만족으로 그치는 게 아니기를.

 

혼자 들어앉아 가만히 글씨를 쓴다. 붓 펜은 여리고 여려서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얼마나 팔에 힘을 빼느냐 하는 게 관건이라. 글씨의 모양은 나도 가늠하지 못한다. 쭈뼛거리듯 가만히 손을 들어 종이 위에서 마음을 고르고 있다가 첫 자를 어찌 내리 꽂느냐 하는 데 따라 그 다음의 흐름이 이어진다. 이제 며칠 안 된 것이라 뭐라 운운하기가 뭣하지만 뭐랄까, 새로운 경험이다. 글씨 하나하나마다 그 의미는 자욱하여서 한참을 들여다보면 좌우의 여백은 그 향기로 가득하다.

 

아이에게도 글을 몇 자 써주었다. 그저 그 모양에 놀라는 아이에게 나는 그 뜻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참았다. 내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연코 연민하는 마음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의 경계란 공연한 자책이거나 섣부른 선행일 거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는 나를 향하신 사랑이면서 동시에 차별이 없으신 거룩하심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그러니 주 앞에 설 때마다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기어이 자신들의 판단과 비난으로부터 놓여나야 한다. 아이 마음에 있는 어떤 서러움과 원망도 실은 그게 다 미움이었다. 부모에 대한 비난으로 언니에 대한 서러움이었다. 다 떠나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가슴을 후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다른 무엇으로 빛이 될까?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15).”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다.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 일처럼 말이다. 결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거듭남이 없다면 이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주를 온전히 알지 못할 때 이는 모두 허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8:24).”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은 답답해한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25).”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 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사 48:20).” 오늘 내게 두시는 사명이었다. 저 아이가 기껏 체육대회를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뜬금없이 내가 생각나서 글방으로 오게 하신 이가 또한 저 아이의 마음을 붙드시고 계심을 신뢰한다. 어찌 주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을까?

 

이번 주일에 아버지 오시기로 하여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었던 날, 나는 글씨를 쓰며 그 말씀의 의미를 새겼고 새삼스러워 그 자유함이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그렇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6).” 주께서 그리하실 일들을 함께 바라고 그 증인이 되는 일이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내게 더하신 주의 은혜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