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7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14:1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 신앙을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가 안 믿는다 해도 아직은 모른다. 믿는다고 해서 그것 또한 모른다. 성경은 말씀하길,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믿음이라 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미 다 보이고, 굳이 바랄 필요도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믿는 까닭이 무엇이겠나.
나는 주가 계신 것과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데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다. 통계나 자료에 의해 ‘그럴 것이다’ 하는 추측으로는 확정지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경계성 성격장애의 대표적인 게 자해다. 그 특징은 애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들어주지 않아서 (또는 들어주게끔 하려고) 자신의 몸을 괴롭힘으로 저를 소유하고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 성향은 주로 십대에 형성된다. 일찍부터 저는 그렇게 남을 다룰 줄 알게 된다. 저의 요구는 끝이 없고 급기야 자신을 망가뜨림으로 상대의 관심과 사랑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어릴 때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또는 방임과 폭력에 노출이 심한 경우에 그 가운데서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의 하나로 고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시간 몸에 밴 습관이면서 동시에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점점 더 극단적으로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본인이 안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이를 이해하고 포용한다고 해서 또한 다스려질 것도 아니다. 수면 아래에 흐르는 물 같다.
주께서 관여하지 않으시면 안 될 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는 말씀 앞에서도 주저한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그 어떤 질병보다 무서운 게 주를 배척하는 것이다. 이를 사사로이 여기는 일이다.
아이를 면회하고 나와 통화를 하면서도 저는 한사코 ‘그건’ 아니라는 식으로 대치하니, 이 또한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요한다고 또는 강제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하여, 그럼에도 주께서 지금 나를 여기 두시는 일이면 마주하고 대할 일이다. 아닌 건 아닌 거다.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다른 더 좋은 수를 바란다면 그리 하시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가정예배로 같이 읽는 말씀에서 그 답을 얻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다. 어떤 관심과 배려도, 희생과 헌신도 아무 소용이 없다. 주께 저의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나는 이를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을 다짐하였다. 나 역시 정신과에 가서 한 달 치 약을 타왔다.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치료약은 중단하기로 했다. 연이어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나름은 이해를 같이 했다.
나는 의사에게 나의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과 씨름하는지 말해주었다. 그동안 저는 나를 그저 글방 선생으로 알고 있었다. 나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이해가 된듯하였다. 자신들도 늘 주의를 듣지만 열에 서넛은 왕왕 공황에 처하기도 하고 불안을 호소한다고 하였다. 그 시달림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가운데 십대들의 자해나 자살 위협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인 것이다. 영혼이 피폐해지는 병이다. 사랑을 구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는 마음에서 그 충동은 더욱 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오직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그처럼 떠돌 듯 세상으로 내려갔던 나로서는 저들의 심정이나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종교를 운운하고 하나님을 뒤로 물리는 까닭도 알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9).” 환장할 노릇이다. 마치 자신의 전적인 이성적인 판단으로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하나님을 배척하면서도 어디 용한 점쟁이를 찾고 신비하다는 돌을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고 있으니. 그런 심정이어서 나는 이제 더욱 주밖에 없음을 확신한다.
오늘 말씀은 이를 명심하게 하신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저들의 완강함 앞에 나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아이는 좀 더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동안 너를 좀 보자. 하고 일렀는데 모르겠다. 하게 하셔야 것도 할 일이지 내가 끌어낸다고 될 일도 아니다.
이는 나을 게 아니라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돌아오면서 그리 생각하였다. 억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뜻밖에도 다른 아이가 이어졌다. 중학교 때 부모의 이혼이 결정적이었으나 공황이 오고 그때부터 경계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다. 대학을 포기하고, 여느 기술을 배운다고 수도 없이 시도했지만 번번이 그때뿐이라. 이번에도 어디 빵집에 취직을 했는데, 공장에서야 아이의 그런저런 사정을 고려하겠나? 결국 그 일도 그만두고 앞날이 막연한 터라. 여러 번 글방에 오게 했으면 하였는데, 통화를 하자 순순히 그러겠다며 오늘 오기로 하였다. 의외였다.
앞서 아이를 두고 기도하였던 보람인가. 주께서 이 일은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갑자기 서너 아이가 한꺼번에 겹치는 셈이라 나는 조금 두렵다.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데, 나 역시 환자라. 이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이가 환자인 내게 환자를 보내신다. 우리는 환자라. 죄인이라. 그러므로 무엇을 붙들 것인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안 믿는 자에 대하여는 어찌할 수 없으나, 주가 이끄시는 대로 해보자. 그리 마음을 먹었다.
나야말로 번번이 치료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휴지기를 두어야 할 판인데, 그러면서도 담당의는 여느 때와 달리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오랜 시간을 붙잡아두었다. 신기하지? 실은 내가 목사입니다. 하는 말을 했을 뿐인데, 저는 마치 나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는 듯. 아니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해도 되는 사람처럼 시의적절하게 이런저런 환자들의 유형과 그로 인해 자신의 스트레스가 어떻고, 그것으로 어찌 시달림을 당하고는 하는지. 한참 들으면서도 왜 이 사람이 저런 이야기를 내게 하고 있는가? 의아할 정도였다.
아하, 주가 하시겠다는 것이다. 나더러 애쓰지 말라는 소리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간단한 진리 앞에 아멘 한다. 뭔 수를 내본들. 그리하여 저 아이를 낫게 하고 나의 질병을 고친다한들. 그래서 이 땅에서 행복을 마음껏 추구하며 산다한들. 결론은 그런 게 다가 아니었다.
주께서 날 위해 구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이 또 어디 있을까? 내가 무엇으로 저들을 건사하겠으며 나 자신을 책임지겠나. 그런 게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나는 그의 통로라. 그 일을 위해 오늘 내게 두시는 장애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 그렇지. 굳이 애써서 낫고자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아니, 그리 두시는 이의 뜻에 따라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주의 일에 쓰이면 되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그리 두신 이가 말씀하신다.
다른 더 좋은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싫어하든 말든, 나의 무기는 말씀으로다. 나부터 바로 붙들어야 하지만 저들에게 권할 수 있는 처방도 말씀뿐이다. 더 나은 명상을 좇든, 힐링을 위해 어디 멀리 떠나든, 어떤 애씀으로도 단지 그 일시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 주께서 나를 어찌 이루어 오셨고, 이루어 가고 계시는가, 나는 분명히 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영혼이 아니었다. 주가 이루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 오늘 오는 아이와는 어떻게 또 이루어 가시려는가. 사뭇 궁금하기까지 하면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이 모든 것이 주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