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한복음 16:20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8-9
모처럼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 믿는 친구가 어떻게 지내? 하고 물을 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잠깐은 생각이 멈춘다. 지나가는 말처럼 안부를 묻는데 있어 잘 지내, 하고 말하는 답은 너무 성의가 없고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를 대답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친구의 두 아들에 대해 물었을 때, 벌써 큰 녀석이 고3이고 작은애가 고1이라는 말에 그런가? 하고 다음 말을 묻지는 않았다. 눈치가 같이 어디를 가다 문득 전화를 한 것 같아서였다. 한참들 힘들어할 나이다, 하는 말에 친구가 알아들은 것이다.
왜 세상은 기뻐하는데 우리는 근심할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말씀 앞에서 알다가도 모를 어떤 이해를 지닌다. 그러려니, 하는 가벼운 안부 정도에는 고통이 없다. 서로가 이를 꺼린다. 적당한 거리다. 더는 내어놓을 것도 더는 끌어안을 것도 없다. 그렇지 뭐, 하는 정도의 이만큼과 저만큼의 차이다.
큰애가 심각할 정도의 학습장애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순히 부진한 성적의 정도가 아니었다. 위로 작은 누이의 딸아이가 공황이었다. 기껏 대학에 들어가고도 몇 번씩 휴학을 하곤 하였다. 이도 벌써 한두 해 전에 들은 이야기다. 더는 다가오지 않아 이내 물어보지도 않았다. 안고 사는 저마다의 무게가 있는 것이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고통하나 그 고통으로 기쁨을 더하는 것이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21).”
그러니 그저 사느라 죽을 지경인 친구에게 나의 오늘은 그저 신선놀음처럼 들릴 뿐이어서, 뭐라 한들 더는 전달되지 못할 말은 이내 삼키고 마는 것이다. 저에게 내가 어떤 아이 때문에, 또는 그 아이의 부모와 가정과 그 영혼의 고통에 대하여 말한들!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호 5:7).” 서로의 고통이 다르다. 아니 저들은 고통을 마다하여 웃음으로 바꾸지만 우리는 기꺼워한다. 우리의 근심은 근심하나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루지 못하면 맡기신 기업을 ‘새 달’이 삼키는 것에 대하여, 금세 웃음으로 덮어버린 슬픔이란 그 효과를 잃는 것이다. 의미없는 고통이란 고통스럽기만하다.
우리의 근심은 다르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이를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기쁨으로 비유하신 것처럼, 우리의 고통은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왜냐하면 이 고통은 세상을 사느라 드는 체념과 달관의 고통이 아니다. 이로써 주의 평안을 소유하는 근심이다.
그렇지 뭐, 하며 너스레를 떠는 친구의 맥없는 말투에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벼운 인사 정도로만 모처럼의 통화를 끝냈다. 나에게는 저의 실제 고통이 돌이켜 주를 바라는 계기가 되어주었는데. 그래서 늘 저 친구를 생각하면 빚진 자의 마음이 된다. 느닷없는 질병으로 눈이 실명 위기에 처하고 두 골반이 괴사하는 끔찍한 고통이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를 부탁하고 아내와 함께 가까운 예배당을 찾았던, 다급한 신호의 대처였다. 그러면서 나는 신학의 길로 들어섰고 친구는 한두 해 뒤 나음으로 ‘그저, 그럴 수 있었던 일’ 정도로 취급하여 도리어 더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이 맹랑해졌다.
신학을 나온 그의 처 역시 급기야 ‘두 아들’을 핑계로 교회를 떠났다. 안 믿던 친구는 본래 자연스러웠던 불신의 외투를 도로 걸쳐 입었다. 저의 생활은 내게 늘 상징 같다. 암시이면서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크다. 위로 두 누이는 모두 주의 길을 가는 사역자들과 결혼을 하였으나 첫째 누나는 찌드는 삶에 기어이 그 신랑은 목회를 접었고, 작은 누나는 딸을 하나 얻은 뒤 이혼을 했다. 그들 내막을 자세히 모르나, 위로 있는 형님은 첫 번째 부인과는 이혼을 하였고 두 번째 얻은 이와 산다. 앞서도 두 아들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친구에게 그들 형제의 삶이 표본이라. 믿음이 있거나 없거나, 도리어 믿는다는 사람들보다 안 믿는다는 형의 삶이 훨씬 더 줏대 있어 보이고 그 삶이 안정적인 것 같으니까.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 삶이 다 그 삶이라. 나는 저의 가정사에서도 교훈을 얻어 오늘 주께서 나에게 두시는 이 모든 현실이 은혜이기만 하다. 이태 전 저의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환갑이 다 된 큰누이는 나를 붙들고 반가워하다, 모친이 눈을 감기 전에 자신의 유년시절 왜 엄마는 그렇게 단 한 번도 자신을 안아주지 않았는지 물었다나. 대답도 못하는 이에게 묻고 또 물으며 그 서러움을 억누르지 못해 문상간 내게도 푸념처럼 늘어놓았던 것이다.
작은누이 역시 목사가 된 막내 동생의 친구라 그러했는지 슬그머니 다가와 자신이 딸애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돌아섰더랬다. 저이는 이혼하고 혼자서 딸애를 키우며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었다. 형님이야 늘 술 좋아하고 산 좋아하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신분으로 흘러간 옛날 얘기로밖에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쌀장사로 평생을 억척스럽게 가업을 이룬 모친과 달리 저들의 부친은 무능력했으며 일찍부터 삶을 등한시하던 인물이었다. 내 기억으로도 크게 존재감이 없던 위인이라 일찍 저가 죽었을 때 비로소 다들 안정을 찾은 듯하였다.
친구 눈에 나의 오늘은 그저 사서 고생이라. 어떻게 지내? 하는 물음 앞에 잠시 어떤 대답을 취해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저의 말 또한 거기까지라. 두 아들에 대해 묻는 나의 안부가 부담스러웠는가. 얼버무리듯 얼른 통화를 끊은 것이어서, 더는 뭐라 말하지 못한 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나는 멍하니 저를 생각하다 주의 이름을 찾았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8-9).”
서로의 기쁨의 결이 다른 것이다. 그 근심과 슬픔의 질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한동안 생각도 않고 기도하지 못하자 주께서 뜬금없이 저에게 전화를 하게 하신 것인가. 새삼 저의 이름을 기도벽지에 붙여두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요 16:1).”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는 주의 음성을 떠올린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이를 요한 사도는 우리의 믿음으로 그 출처를 삼는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 믿음이 오늘 주일 말씀으로 증거 할 ‘하나님의 한 의’다. 내가 믿는 줄 알았는데 나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였다. 그리스도 예수를 제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 14:36).” 이처럼 정말 우리에게는 별 거 아니게 쉬운 일이 누구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는 것이었으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그렇다 알려줘도 그저 귓등으로도 들으려하지 않는다. 사느라 죽겠다. 보면 저들 인생이 그렇다. 넌 어때? 하면 다들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같다. 그렇지 뭐, 하고 내 쉬는 한숨이 그저 다만 사느라 겹다.
아이들이 곤죽이 되는데도 모른다. 참 모진 게 불신앙이라. 믿음은 기적 중에 기적이다.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한 의다. 자발적으로 내 의지와 노력으로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러는 생의 막바지 고통이 저의 용기가 되기도 한다.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 14:36).” 하나님 아버지, 우리 딸아이를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하자. 애원하듯 저이에게 말했어도, 아냐! 아직은! 나중에! 하고 손을 내젓는 저의 완고함 앞에서 더욱 분명하게 알았다.
믿음이란 거저 주시는 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처럼 쉬운 것인데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것만은 거절하는 것이었으니. 나는 오히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 이 또한 내가 어찌 설명할 수도 권하여 강제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도 이는 못하시는 일이다. 죽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실 수는 있었으나, 그 사랑을 억지로 강요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그러므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내가 친구를 마음에 두고, 또 누구를 품어 속이 볶이는 이 일을 마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이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주께서 다 아시고 이기신 일이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
아,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 이에 나의 복이 얼마나 큰가.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나는 저의 가정사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그 숨결을 교훈 삼을 수 있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가벼운 농담으로나 그 속을 달래려 하는 것일까?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이에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