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19:10-11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편 19:12-13
그러므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누구보다 연약하고 부족하여 내가 누굴 인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같이 말씀 붙들자고 했다. 한 장이든 한 구절이든 깊이 묵상하여서 그것으로 표준을 삼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기도도 좋고 찬송도 좋고 성실하고 정직한 삶도 좋지만 이 모든 기준이 성경인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의 이런저런 상태와 그런 가운데 놓여있는 절박한 생활의 면면을 말하다 아이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 시간이 겹쳐서 딸애와 그 친구도 같이 식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의 조증과 울증은 극과 극이었고, 이를 다스리려는 약물 부작용으로 지능지수는 낮아져서 초등학년 수준이 되었다. 장애판정을 신청하였고 그것으로 어디 복지관을 통해 취업이라도 할 수 있는가, 하고 모색하는 거였다.
저이도 교회를 나가기는 하나 어디 집근처 큰 교회를 찾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상황이 드러날까 하여 주일만 그리 다녀오는 정도라고 하였다. 교회의 우선이 서로를 향한 기도인데, 이를 공유하는 게 교회 공동체의 으뜸이라 말해주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그 심정은 알 것 같아서, 누가 알까 하여 또 저들의 동정을 사는 일이라 구차한 듯도 하여 그럴 수는 있겠으나, 이를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것이 또한 교회의 역할이라.
그러게.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나의 어려움도 주가 아시고 저이의 애통해하는 마음도 주가 아시니, 묵묵히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생각하였다. 다만 내게 두시는 오늘에 전념하는 것뿐이었다. 마치 그 부모라는 역할도 또 그 책임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으로 여기지만 그 또한 주의 것이라. 아이로 인해 자신이 놓아버릴 뻔했던 생명을 곧추세워 다시 살게 된 것이 아니겠나. 지금 저 아이로 인한 주의 은혜를 말해주고 싶었다. 그것으로 힘에 겨워, 때로는 아이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모정이 아닐 수는 없겠으나, 아이를 향하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도 엄연한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로 함께 주를 바라게 하신 것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이라. 행복도 불행도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나는 이를 묵상한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 19:10-11).”
아이를 향한 심정이야 누군들 그 모정을 대신할 수 있겠나만 그것으로 하나 되게 하심이 또한 귀하지 아니한가. 아내는 덩달아 혼자 떨어져 사는 아들애를 생각하였고, 늘 차갑기만 한 아들의 마음이 혹시 어떤 응어리가 있어서는 아니겠나? 안절부절 마음이 심란하였다고 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빌라도와 같은 마음으로 사는지. ‘내가 놓을 권한도 못 박을 권한도 있다.’ 하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이 아이를 어쩌나 싶은 저들 모정을 두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저마다 자신의 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주인으로 여기는 듯하여 저의 말이 그동안 우리의 주장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와중에도 그와 같은 권한이 결코 저의 것이 아님을, 그것까지도 위에서 주신 것임을 상기하게 하신다. 즉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현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그리 놓인 현실이 때론 억울하고 불공평하고 분하여서 참담하기만 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보다 더할까? 억울함으로 치면 자신을 넘겨준 저들에 대한 어처구니없음이 더하지 않겠나?
이에 저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을 못 박으라, 죽이라 하는 원성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 19:15).” 이보다 더한 농락이 어디 있으며 말도 안 되는 원성과 악함이 또 어디 있을까?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6).” 정작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란 예수께서 대신 지신 그 십자가의 것에 비할 수 없다.
그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나의 마음을 여시더니 저이의 마음도 그처럼 열어 모두가 함께 눈시울을 붉히며 주의 이름을 바라고 구할 수 있게 하셨다. 찬송이다. 주를 바라는 게 기도다. 어찌하여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한탄과 원망이 일다가도 그것으로 우리가 모두 주를 바라게 하시는 데서 그 자리가 예배다. 더는 주가 아니시면 감당할 수 없는 자신과 자식의 여느 사연들을 내려놓고 주 앞에 앉는 일.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의 주된 원인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더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만하여 예전과 같이 주를 외면하며 살지 않게 하시려고, 이 귀한 진리를 잃어버릴까 하여,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에 우리는 힘에 벅차서 때론 주께 고하기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 그것을 두고 기도하는 것이 사람이지 않겠나.
서러움으로 주 앞에 엎드리고 바라는 바 우리의 고통을 면하게 하여주시기를 구하는 일이야,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우리의 연약함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를 지나다보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오히려 지금의 내 어려움이 또 고통이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안다.
사람의 머리로 또 감정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라. 당장 고통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는데 그리 대놓고 종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내가 먼저 쩔쩔매며 아파할 줄 몰랐다면 지금 내가 그와 같은 아이의 처지와 사정을 어찌 알기나 했을까? 또한 그 사무치는 모정을 가늠이나 할 수 있었겠나? 어렵고 힘들지만 어렵고 힘들어서 그 은혜가 더 귀하고 큰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긴장한 나머지 여느 날 보다 안정제도 더 먹어야 했고, 어떤 불편함과 긴장감이 나를 예민하게 옥죄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주를 바라는 것.
그럴 수 있게 하시는 그게 큰 은혜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 두 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내가 어떠했던가? 그런데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4-7).”
이 모든 게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얻은 것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이로써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결코 나의 수고나 애씀의 결과가 아니다. 빌라도와 같은, 모성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목사의 권한으로도 아니다. 수고하여 노력하여 얻어지는 게 아니다. 긍휼하심으로다. 성령으로다. 이것으로 우리를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심이다. 더는 이제 본성적으로 살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믿는다고 믿으면서 다닌다고 다니는 교회 생활이 우상숭배일 수도 있음을. 모정으로만 그 안타까움으로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달래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는 어림없다. 그러한 수고와 노력이라면 절에 가고 어디 산 좋고 물 좋은 동산에 오르는 게 더 낫다. 다를 바 없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6).” 우리가 주를 바람이란 당장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게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의 잃었던 참 예배를 찾는 길이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7-8).” 더는 그럴 수 없는 자리. 나의 바람과 요구마저도 부끄럽고 송구하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이 은혜가 귀하고 복된 것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그럴 수 있기까지 서로의 격려와 위로와 지지가 함께 있는 곳이 교회다. 그와 같은 기틀은 기도다. 가만히 저이를 위해 기도한다. 오늘도 오는 아이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