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2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주의 영이 함께 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들 그저 각자 그 개별적인 삶을 살뿐이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 그 각각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다. 생활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같지 않으나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오전에 중3 아이가 와서 아이의 글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이 어둡고 음습했다. ‘집’에 대한 슬픔이 짙었다. 끝나고 혼자 노래방엘 가고,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를 생각하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내와 같이 늦은 점심으로 국수를 먹고 올라오자, 아이 문제로 누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스스로 말하길 큰 트라우마가 두 개 있다고 했다. 하나는 중3 때 어느 채팅앱에서 만난 누구와 노래방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과 고1 올라가며 ‘동성애아이’와의 깊은 교제가 있었다고 했다. 모든 문제는 단일적이지 않다. 아이 아빠의 평소 ‘추근거리는 성향’이 아이의 경계를 허물었던 것 같고 엄마의 무신경적인 반응이 아이를 밖으로 내돌린 건 아닌지. 이는 좀 더 심각한 문제라 월요일에 퇴원을 해서 청소년 담당과로 따로 상담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그런 얘길 이제와 처음 들은 아이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워했고, 그래서 그런지 아이아빠는 시댁 식구들 핑계로 술자리에 가 있다고 했다. 또한 부모들 각각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기들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은 물론 같이 어울리던 모든 이들의 성향과 중첩된다. 이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주의 긍휼하심 앞에 나는 이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아무리 뭐라 해도 들으려고 하질 않으니, 나중에! 그건 아니고! 하는 식이다.
고의적인 회피와 외면은 거역이다. 그럼에도 저는 수시로 통화를 원했고, 다급하기는 하였다. 아이가 또 오늘 외출을 나오는데 어제 그렇듯 두 부모를 한 명씩 불러 마치 자신의 사건을 통보하듯 알리고, 이를 통해 모두를 조종하려 드는 것이다. 물론 그 힘듦이 어떨까,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죄성은 여지없이 발휘되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삶을 창조하신 이는 그렇게 복잡한 구조로 인간을 만드시지 않았다. 그처럼 단순명료하였을 삶에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으로 타락은 진행되었고, 꼬이고 꼬여 그 ‘상실한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다.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다.
한데도 아니라고 하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2-3).” 이 급박한 현실을 여전히 안이하게 본다. 주를 의지하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되는 현실을 두고, 쩔쩔매면서도 한사코 그건 아니라고 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아이를 생각하며 또한 그 부모를 두고 주께 묻고 바란다. 다음 주에 퇴원을 하면 어떻게든 아이를 데려올 모양인데, 나는 먼저 두렵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으로 주께서 한정하고 계심을 믿는다. 주일 날 같이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인가 보다. 결혼을 앞둔 아이들도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오전에는 오기 힘들다며, 결국 오후 세 시께 인사를 오기로 했다. 바쁜 와중에 그렇듯 마음을 두는 것도 고마울 것이니, 나는 아이들이 오면 줄 글씨를 썼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글씨를 쓰는 일은 새롭다. 여러 번 다시 쓰면서 그 의미는 더욱 뚜렷해졌다. 그 형편이 어떠하든, 나름들 다 사정이 어떻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구구한 변명들이 난무하지만, ‘이 모든 것 위에’다. 사랑을 더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우리의 감정을 사랑으로 여기고는 하는데 이보다 더 실체가 없는 허상은 없다. 아마도 서너 달 동안 아이는 채팅앱에서 누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를 사랑이라 여겼을 것이다.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를 기어이 불러내서 노래방으로 끌고 간 인간도 분명히 그걸 사랑이라 했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사랑의 실체는 무엇인가? 탐욕과 음란함이 더해져 자신의 허기를 달래려는 금수(禽獸) 같은 요구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서 아이아빠는 가족들과의 저녁 약속을 핑계로 술에 취했고, 아이엄마는 ‘선생’과의 통화로 뭔가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히려는 정도의 자기방어와 회피가 사랑으로 둔갑을 한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12).” 그렇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숱한 별개의 감정 중 하나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의 의무인 것이다.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 한다. 그랬을 때,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13).” 용서란 내가 누구에게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나에게 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곧 용서받지 못한 자는 용서할 줄 모른다. 피차 용서해야 하는데, 이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가해를 하고 서로로 인해 피해를 당한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받을 수 없고 용서를 받지 못하면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 구구절절 사는 데 따른 온갖 사연들을 다 덮을 수 있는 사랑이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나는 결혼을 앞둔 두 젊은 한 쌍의 남녀에게 이 말씀을 주고 싶었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말씀을 썼다. 그 유명한 사랑장인데 우리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사랑이다. 어찌 참고 견디며 믿고 바랄 수 있겠나? 그 의지의 한계를 주 앞에 내어놓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 장의 파지를 남기면서 글씨를 썼다. 부부로 산다는 일은 주께서 허락하신 공동체의 가장 최소단위로 오늘 본문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다른 언어, 다른 풍습, 다른 환경에서 다른 각각의 성향으로 살아왔으나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심을. 이를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12-13).” 그 온전함이란 주의 사랑을 그 모든 것 위에 더할 때이다. 그 사랑으로만 견딜 때이다.
결국은 우리가 주의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볼 수 없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나의 온전함이 아니다. 나의 거룩이 아니다. 우리로서는 이룰 수 없는 거룩이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곧 나를 두고 주변으로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을 보면서, 나는 이와 같이 말씀의 실현을 목도한다. 결론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1).” 이를 저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이처럼 저들의 사정을 곁에서 대면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결혼을 앞둔 두 아이의 앞날에, 나는 오늘 저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주께서 고쳐주시리라.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8-19).” 주가 아니하시면 난들 오죽하겠나. 주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그리하여 우리는 부활을 살아야 한다. 오늘 증거할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거듭나지 않고는 달리 손쓸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3).” 이를 누가 하게 하시나?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래서 나는 아이를 생각하고, 곁에 두시는 나의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곧 주는 나로 하여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