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친밀하심

전봉석 2018. 5. 29. 07:0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14

 

 

 

대학에 가고 싶어요. 아이의 말이 뜬금없었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자신의 지능을 두고 낙심하는 소리였다. 아이엄마는 지능저하를 장애판정으로 삼아 어디 취업이라도 하길 바랐으나, 69점과 71점의 미묘한 차이로 아이는 정상을 판정받았다. 그래서 엄마가 울었어요. 그날 하필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아이의 말은 두서없었으나 전해지는 슬픔의 농도는 알 것 같았다. 무엇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소망은 결국 믿음의 확신이다. 주를 바람으로 이 땅에 부여하시는 삶의 형질이 우리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게 하시는 이의 사랑이었다. 주일에도 와서 여기서 예배를 드려도 되냐고 물었다. 자신은 오후 2시에 청년부 예배를 나가니까 그러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다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 목사님이 ‘어디서’ 성경공부를 한다니까 이단을 우려하여 가지 말라고 하셨단다. 혹시 또 그리 걱정하시면 전화하시라해라 하고 아이 손에 명함을 주었다. 아이엄마는 폐 끼친다는 이유로 자주 가는 것을 우려하는가보았다. 그럴 수 있겠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온통 이런저런 사연들이 난무하다. 주를 바랄 수 없는 사연이 주렁주렁 열렸다. 소망을 가질 수 없게 한다.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어쩐다? 그럼에도 주가 함께 하신다는 소망이 아니고는 이 믿음의 길을 갈 수가 없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멀찍이 서서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짓눌리는 셈이다. 내가 나서서 뭐라 이를 수도 없는 일이다.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믿음을 엉뚱하게 허비하는 셈이다.

 

앞이 캄캄하니 그럴 수 있다. 아이 일로 그 장래를 어찌할까, 하는 염려로 말이다. 다른 수 있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아이가 뜬금없이 대학 가고 싶어요, 하는 말에 그러자. 같이 하자. 하고 아이를 달래었다. 스스로도 엄마의 염려가 자신 때문에 그러는 것을 아니까 더 주눅이 드는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시다. 주님도 소망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셨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서 말이다. 소망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어찌 알려주어 마음의 힘을 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에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저이에게도 얼마나 큰 복이었나, 혼자 생각하였다. 믿고 의지하였던 남편의 외도는 끝내 별거로 이어져 몇 년째 ‘용서할 수 없는 일’로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니면 벌써 죽었을 텐데, 그 극단적인 생각을 막아준 것이 아이의 고통이었지 않나! 결국 이 아이의 오늘이 저이를 살린 것이다.

 

우리는 자꾸 현실적인 문제로 염려하는데 주님은 자꾸 영적인 문제로 환기시키신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7-18).” 이를 말로써 알게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 이름 예수밖에는 다른 답이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방법을 달리 하고 어떻게든 좀 살아보겠다고 바동거리는 건 알겠는데, 그랬던 결과가 어떠한지 여태 살아오면서 잘 알지 않나. 큰아이는 외적으로 강하여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경우라 씨알도 안 먹히듯 냉랭하고, 작은아이는 내적으로 약한 아이라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니.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부디 더욱 주를 바랄 수 있었으면. 내가 나서서 아이엄마에게 뭐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아이를 위로하고 함께 요한복음을 읽었다. 아이의 기도가 순박하였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이에게는 그래서 더 주를 바랄 수 있는 새 마음을 주시는 게 아니겠나. 같이 내려가 식사를 하고 아이는 다소 의기소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버스카드에 충전이 안 됐다며 도로 왔다. 나는 목에 메고 다닐 수 있는 카드지갑을 함께 주었다. 아이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는 다독이고 주의 도우심을 바랄밖에. 수요일에 뵐게요, 하며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데 아이엄마의 마음이 억장이 무너질 것도 같았다. 어쩌면 나는 또 한 자리 건너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나.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던 그 마지막 말씀이 사랑이셨구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순종하는 결과가 사랑이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그럴 수 있는 것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내 안에 이는 어떤 사랑스러움이 주가 두시는 마음일 거였다.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마음이 쓰이는 이 마음도 주의 것이겠다. 이로써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 결국 내 마음을 주께 드리는 일이고 내 눈으로 주의 길을 즐거워하는 일이겠다.

 

곧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주의 언약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이다. 내가 아이를 두고 바라게 하시는 기도는 응답하시기 위한 거였다. 아이로 인해 아이엄마의 마음에 참 영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채워주시려고. 문득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말씀 앞에 부복한다. 내 아버지가 나의 나 된 것으로 그 절박함 때문에 주를 바랄 수 있었던 것이고, 내 어머니가 더는 하나님이 아니면 다른 수가 없다는 절실함으로 주의 도우심만 붙들고 살 수 있게 하였던 것이고, 그리하여 비로소 오늘의 나로 하여금도 나의 나 된 것이 복에 복을 더하신 것임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곧 우리에게 두시는 고통은 주를 바라게 하시는 동력이다. 기어이 주밖에 없음을 알게 하시는 축복의 통로다.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글씨를 쓰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하여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 5:10).” 단순히 오늘 내일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 정도의 해결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2-13).”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1:13-15).” 이렇게 다시 읽는다. 아이로 인해 주의 명령을 청종한다. 귀를 기울여 듣는 일이 가능해졌다. 언제 또 주 앞에 그처럼 엎드려 기도한 적이 있었나? 서러워 가슴을 쥐고 주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나?

 

이로써 주를 사랑하여 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주를 섬기면 주께서 이른 비, 늦은 비로 적당한 때에 내리신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가장 피부로 와닿는 손길이지 않던가? 삶의 만족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것이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13:3).” 다른 데 귀 기울일 거 없다. 위로를 얻으려고 더 나은 교회를 찾아 전전긍긍하니 그게 더 고역이라.

 

값없이 주신 은혜는 감사와 찬양으로 다시 주께 돌리는 데 있다. 이만하길 감사하고, 그러하여 주의 은혜를 찬송할 수 있을 때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는 생전가야 더 나아질 게 없다. 어쩌겠나? 기어이 살아서 살아보고 알 일이라 하면 사는 날까지 사는 수밖에. 살아서 그 생을 다하는 동안 자신이 이고 지고 그 고역을 감수하느라 등골이 휘는 수밖에. 그런들 오늘 감사할 줄 몰랐던 일이 새삼 찬송이 되어지겠나? 나는 아이엄마에게 그리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을 글씨로 썼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그럴 수 없음을.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 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곧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오늘 우리에게 더하시는 이 모든 날들의 수고와 애씀이 또는 마음 졸이고 서글픈 애처로움까지도, 주의 풍성하신 은혜를 알게 하려는 것이니.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온유함이란 다른 내 주장을 접는 일이다. 내 생각과 내 기준을 파기하고 주 앞에 가만히, 주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일이다. 그 온유함으로 만족을 얻는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는 것이었다. 곧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이로써 오늘의 우리를 세우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연약함과 어줍고 답답한 일들이 주의 친밀하심으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으니,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14)” 곧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