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행전 6: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그 이름’을 위하여 합당한 자로 살 수 있는 것이 주께 영광을 올리는 일이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살면서 주를 바람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할 수 있는 게 복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 그 이름을 붙들고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 있는 게 주께 영광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 4:16-17).” 이에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하나님은 권능자시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 62:11).” 이를 묵상할 때,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상황을 선히 대할 수 있다. 나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내게 ‘저 아이’를 보내시는 까닭도 선명해진다. 이런 일에 내가 먼저 쩔쩔매는데도 주를 바라게 하심으로 주만 신뢰하게 하신다. 가령 다 늦은 오후께 아이를 데리고 왔다. 월요일에 퇴원을 하고 하루 이틀 어디 좀 외출을 했다고 들었다. 이제 열여덟. 한참 발랄하고 티 없이 고울 나이였다.
아이가 온다는 소리에 내가 먼저 숨이 가빠 안정제를 먹었다. 아이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나름은 자연스럽게 행동하였다. 어디 나가서 저녁을 먹기는 어려워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이의 팔뚝에는 여러 번 자해를 한 흔적이 선명하였다. 잠깐 동안에도 퇴행과 평정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같이 웃을 때는 덩달아 기분이 좋았으나 시무룩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는 마음이 어려웠다. 급기야 얼굴이 노랗게 질린 아이가 엄마에게 안정제를 찾았다. 오기 전에 먹었다며 아이엄마는 좀 더 참아보자고 일렀다. 많이 힘드니? 내가 묻자 아이가 입을 삐쭉거렸다. 어떻게 힘드니? 하고 물었다.
숨을 쉬고 있는데 숨을 쉴 수 없는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하고,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어떤 불안함’ 때문에 팔을 긋고 싶다고 했다. 팔을 또 그을까봐 불안한 것인지, 불안해서 자해를 하고 싶은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거기가 좋은 건 아닌데, 언제든 저들이 도와줄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라고 했다. 모처럼 길게 말을 하는 아이를 천천히 관찰하였다. 힘들어하는 아이 때문에 나 역시 불안감은 고조되었다. 주머니에서 내 것을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내 앞에 두시는 일련의 상황과 사람으로 인해 나는 더욱 주를 바란다. 이를 어떻게 알려줄까? 종교적인 이유로 아이는 내게 오는 것을 망설였다고 했다. 아이엄마는 여전히, 다 좋은데 신앙적인 것으로는 이해도 해석도 원하지 않았다. 나는 굳이 기도하자고 안 했다. 너희들이 싫어하니까 나 혼자 할게, 하고 식사기도도 보란듯이 혼자하였다.
신앙이야 말로 빈손으로 주 앞에 서는 일이다. 신앙이 있나? 얼마나 신앙이 좋나? 하는 건 그만큼 빈손 들고 주 앞에 서느냐? 하는 문제다. 무슨 결의도 아니고 나름의 확신도 아니며 어떤 굳은 신념도 남다른 자세도 아니다. 신앙이란 ‘빈손’이다. 주밖에 다른 방도가 없음으로 빈손 들고 주 앞에 서는 일이다. 이는 내 생각이나 내 의지를 접는 일이다. 어떤 계획도 나름의 판단이나 기준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그냥,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 하는 일이다.
오전부터 정신이 없었다. 노인이 건너와 문서작성과 함께 스마트폰으로 다이어리 정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곧이어 아이가 와서 같이 요한복음을 읽었다. 유난히 하품을 자주 했고 시선을 놓곤 하여 내가 더 불안하였다. 아이와 내려가 쌀국수를 먹고, 금요일에도 와도 되냐고 물어 그러라고 하였다. 덕분에 틈틈이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해야 했다. 아이엄마에겐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말을 너무 아이에게 하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아이 입에서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나와서 말이다.
잠깐 뒤 신대원 동기 전도사와 모처럼 길게 통화를 하였다. 교단은 협소하였고 사역지는 마땅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처제들과 같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주일을 시작하면 어떠냐고 권하였다. 우리가 할 게 무언가? 오늘 말씀은 이를 엄밀히 알게 하신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목회를 하지 않을 거면 모를까, 일할 데가 없어 일을 못하고 있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이미 우리 삶은 그 자체로 모든 게 주의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환경이야 그럴 수 없는 처지를 놓고 변명하게 하지만, 그럴 것도 없다. 그런 가운데서 우린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돈벌이를 두고 앞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저런 사정을 자꾸 드는 건 결국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을 그래서 못하겠다는 소리다. 믿음으로 산다는 일,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이미 주의 사역이다. 어떻든 주의 신호다. 돈에 쫓겨 사역지를 찾든,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심정으로 견디든, 다른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을 모색하는 것이면 그 일들 가운데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면 될 일이다. 쉽지 않은 게 언제나 현실이라. 현실은 자꾸 타협을 내민다. 그래서 못하고 있다는 소리가 일상이 되게 한다.
저와 통화를 길게 하느라 아이와 함께 오겠다는 문자를 한참 지나고 난 뒤에서야 본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들어앉아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내게 맡기신 일이었다. 내게 바라는 단 한 가지 신앙이었다. 빈손 들고 주를 바라는 일. 아이가 왔을 때 나야말로 어떤 불안이 나를 주도하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어쩌겠나. 그래서 나는 더욱 주를 바란다.
전혀 안 그렇게 보여요. 저들의 말이다. 물론 신경안정제를 먹었지만 아이의 초조와 불안이 내게도 전이되어 나 역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어쩌겠나?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이가 그런 내게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을 놓아두시는 까닭은 오히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다.’ 스데반을 위시하여 그 당시 사도들의 이와 같은 충만함은 도리어 그 여건이 좋지 않아서다. 박해가 심해서다. 어려움이 가중돼서다. 전혀 그렇게 안 보여요, 하는 저들의 말을 나는 그리 이해한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내가 그럼에도 평안할 수 있는 것은 평안할 수 있는 여건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주를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 맘 알아! 아이의 말에 동조했다. 나도 종종 몸이 너무 힘들 때, 어떤 불안이 나를 엄습할 때, 어디 요양원에라도 들어가 있었으면 할 때가 있어! 언제든 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 아이가 도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싶다는 말에 동조하며 그 의미를 말해주고 싶었다. 그처럼 그저 안주하고 싶어 하는 속성이, 아이가 아프니까 아이만 그런가?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그러저러한 오늘의 환경이 또 우리의 기질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래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위로를 삼으려 하게하고, 그 일에 안주하며 여러 핑계를 일삼게 하는 것이다. 나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 같더라는 말씀을 조금은 안다. 우리에게 바라시는 신앙이다. 빈손일 때 자유롭다. 뭘 쥐면 그래서 그만큼은 주를 바랄 수 없다. 잠시만요, 하고 주를 기다리게 한다. 이것만 먼저 하고요, 하는 동안 어느새 훌쩍 나이가 들었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인생 참 야멸차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나야말로 아이보다 더 불안감을 느끼고,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도 쩔쩔매는 위인인데, 이를 주 안에서 자랑하는 일. 그럴 수 있는 것은,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권능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내가 좀 나으니까, 저들보다 그래도 좀 나은 게 있으니까 여기서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욱 그럴 수 없는 나의 빈손을 들고 주 앞에 서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나의 약함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심으로.
나의 신앙이란 빈손으로 주 앞에 서는 일이다. 나야말로 죽겠어서 나는 주밖에 바랄 수 없음을 더욱 알게 하신다. 곧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이로써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그러므로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 27:13).”
이에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