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하여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도행전 10:34-35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31:13-14
어떠했으면 좋겠다. 그리 되겠지. 하는 나의 기대가 물거품이 될 때. 심지어 우호적일 거라 여겼던 그것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 오늘 말씀은 그에 따른 대처능력을 알게 하신다. 곧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그러하기를, 그러할 수 있기까지 주께서 주도하신다. 이끄시고 다스리신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5).”
아이의 다소 과장된 모습이 나는 순수하였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그 마음이 주의 것이라 여겼다. 복음의 기본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우리는 저의 이런저런 사정을 두고 염려하며 안쓰러워도 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을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잘났다고 여겨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 수많은 이들에 비하면 백 배 천 배 귀하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당장 아이 문제에 함몰된 어떤 이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문제에 몰두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다. 먹고 마시는 일에 급급한 경우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돌아볼 수 없는 진리다. 떠듬거리고 어리숙하며, 금세 또 잊고 엉뚱한 말로 대답한다 해도, 그 가운데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음을 확신하였다.
곧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누가 저의 외모만 보고 뭐라 판단할 것인가. 오히려 잘난 줄 알고 스스로 의를 구하는 여느 사람들의 열심보다 낫다. 어릴 때 종종 다녀오곤 하였던 ‘은광원’이 생각났다. 늘 그 아이들 가운데서 느끼곤 하였던 활력을 이제와 보니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설명해도 될 것 같다. 같이 찬양을 할 때나 말씀을 들을 때, 소위 정상인들에 비해 산만하고 어리숙하고 때론 말도 안 통하는 것 같으나 그 에너지는 확실히 달랐다. 발음도 시원찮고 외모로는 가소롭기 그지없었으나 늘 돌아설 때면 도전이 되었고 그 기쁨은 내게도 이어졌다.
아이가 돌아가고 아내는 전철을 타고 전에 살던 동네 마트에까지 도전해보자고 하였다. 그래봐야 네댓 정거장에서 환승하여 두어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 길이었는데, 나는 망설이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용기를 냈다. 내 안의 어떤 불안이 또 망설임이 아이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힘에 겨워 택시를 타야 했지만, 문득 아이로 인해 또한 내 안에 생겨나는 어떤 변화인 것을 감지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혈통으로 나은 자들이라는 것. 그 사상도, 어떤 파도, 무엇을 반대하는지도.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행 28:22).” 이에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5).” 우리 안에 그와 같은 마음을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한 의’는 곧 ‘아브라함의 의’로 이어져 오늘 우리 개개인의 의로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하나님의 의로 어떠하든,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할 수 있는 의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곧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 어찌 내가 속되다 할 수 있겠나. 서로 하여야 할 일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그래야지 되는 게 아니라, 그리 되어지는 됨이었다. 신기하게도 서로가 좋아라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이 모든 게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리 꾸며지는 억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이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다음을 어찌 이어가실지 알 수 없으나 그 모친이 그저 큰 교회에 다니는 것에 대하여도 이해가 간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는 것이다. 또는 아이의 퇴원 이후 옴짝달싹 못하는 누구에 대해서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 정녕 그 안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이 없다면, 다들 나름의 방도를 강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여전히 초보의 길을 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배회다. 망설임이다. 그저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처지인 것이다. 그 고집으로, 또는 자신의 판단으로 인하여. 어쩌겠나? 나는 점점 살아보며 산다는 일의 허망함에 대하여 탄식한다. 기어이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는 모르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황망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조금 나아진 것으로 기뻐하고 금세 어두운 일로 근심하는, 말씀에 초보인 삶의 구슬픔에 대하여.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13-14).” 어렵고 고단한 일은 마다하는 동안에는 별 수 없다. 자신의 판단으로 말씀을 뒤로 물릴 때도 별 수 없다. 우리 안에는 어김없이 학습된 무기력이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타성에 젖어 하루 이틀 세월만 흘려보내는 꼴이다. 누가 의인이겠나?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스스로는 안 된다. 신앙은 빈손이다. 주 앞에서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없음을 두 손 들고 아뢰는 일. 결혼을 앞둔 어린 예비부부의 다음은 상황은 어찌 된 것인지. 자해와 불안으로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아이와 그 엄마는 대체 어찌 다음을 대처하고 있는지. 같이 성경을 읽자 하고 내내 연락도 없이 지내는 아이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 더는 예배에 나오지 않고 나의 연락을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는. 누구는. 또 누구는. 내 안에 이는 불편한 인물들을 떠올리며 주께 고하는 일이다.
좀 괜찮은 그림을 그린다. 어떤 희망도 꿈꾼다. 이러면 어떨까? 하는 나의 구상은 여지없이 뭉개진다. 그러니 어쩐다? 오늘 말씀은 그러할 때의 방도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내 생각과 달라도.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도. 심지어 엉뚱한 길로 인도하신다 해도. 이게 아닌데? 싶은 어떤 서러움과 불만이 내 안에 가득 들어찬다 하여도. 좀 괜찮아? 하고 아내가 묻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하철 안에서 남들은 다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쩔쩔매는 꼴이 우습기도 하였다.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7-8).” 그리하여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다 해도(12),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15, 21).”
결국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오는도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롬 12:9).” 그러므로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
곧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