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사도행전 11:17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아이가 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였다. 전날 주일에 있던 감격을 말하는데 그의 과장된 표현이 놀랍게도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에게도 주셨다. 다소 모자란 부분에서 주의 영광이 드러난다. 우리의 간절함은 만족에서 나오지 않는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시 32:4).” 그처럼 힘에 겨워할 때, 그래서 주를 바란다.
오후께 중3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 달에 내보낸 모 백일장에서 입선을 하였다. 규모가 큰 대회라 10명이 뽑혀 각각 상금만도 30만원이니, 중학생에겐 크고 영광된 일이었다. 잘 됐다. 자존감이 땅에 떨어져 스스로 비굴해하던 시점에서, 하나님은 참 절묘하게 일을 벌이신다. 나도 더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막연하였던 시점이다. 그 애와 같이 나가려 했던 다른 아이가 마음에 밟혔다. 그때 학교 선생이 추천서를 못 써주겠다고 해서 일이 틀어졌다. 아이의 부러워하는 모습 뒤에 어떤 비난이나 원망이 느껴졌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 일을 분별한다. 그리 지혜를 구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모든 게 우연은 없다. 그 안에 주의 뜻이 담긴다. 그럼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이런저런 치료와 나름의 방도를 찾는지 아이가 퇴원한 후 아이엄마는 연락을 주지 못했다. 눈치가 늘 아이를 끼고 있는 모양인데, 그러지 말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어서 가만히 주의 뜻을 기다린다.
어느 교회에서 우리 교회를 단 얼마씩이라도 후원을 할 것이라며, 약사아이가 알려왔다. 이런저런 상황을 말해주었다며 혹시 기분 상하지 않는지 물었다. 전에 같으면 누구의 동정이나 어떤 관여가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것도 또한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 오히려 나는 이제 나의 연약함을 자랑한다는 바울의 고백을 사랑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내가 저 아이를 생각함은 나의 연약함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시기 때문이다. 왜 그처럼 왕따 당하는 아이가 많은지, 어디가 모자라 그것으로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되는 아이가 눈에 밟히는지, 왜 저이의 저런 괴로움이 내 것처럼 여겨지는지. 그것은 나의 연약함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내가 언제 이처럼 누구를 생각하며 산 적이 있었나? 그래서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행 11:23).” 바나바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의 공통점이다. 이를 바라는 마음이 내게도 있다.
아이가 자해를 멈추고 불안에서 벗어나길 바라기보다 그 가운데서 주를 마주하고 교회로 나올 수 있기를. 그 부모가 잃어버린 신앙을 찾기를. 그게 훨씬 더 값지고 소중한 것에 대하여, 우리 중3 아이가 상을 타서 자존감이 올라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교회로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데 마음이 온통 사로잡히는 것이다. 좀 나아진들, 그래서 나름 행복하게 산다고 한들!
우리의 행복보다 유치한 게 또 어디 있겠나? 일시적이고 그저 그 순간이 전부인 게 행복이라 그걸 가지고 삶의 목표로 삼은 일은 어리석다. 이를 어떻게 하면 알려주어 우리가 함께 주를 바라며 찬양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아이가 상을 받았다고 해도 심드렁했다. 종교를 운운하며 교회를 거절한 아이였다. 나야말로 괜히 심통이 난 사람처럼 하필 그런 애한테 저런 상을 주시다니! 하는 심보로 그저 시큰둥해있었다. 내 속을 가만히 들춰보면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지 모른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주를 바라는 이 아이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었으면. 수능에 대해 언급하고 올 가을에 시험을 보자고 말을 해놓지만 그게 또 그럴 수 있기는 한 것인지. 하루하루 그냥 저러고 있으니 아이엄마의 속이 터질 만도 하겠다. 그러니 어쩐다. 천진난만함도 어릴 때나 귀여운 것이지, 스물둘. 보란 듯 성인이 된 아이인데, 주께서 어떻게 하시려나? 나 역시 덩달아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니 내 속을 나도 모르겠다. 조금은 너그럽고 의연하여, 그래서 주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느긋했으면 좋겠는데. 내 속이 밴댕이 속알딱지여서 나 혼자 끙, 하고 돌아앉기 일쑤다. 좋아라하는 중3 아이보다 부러워하는 다른 아이가 마음에 쓰이는 일이고. 예비부부의 이런저런 속사정에 대해 안타깝다가도 저를 어떻게 해야 주 앞에 나오게 할 수 있을까? 혼자 뚱한 것이다. 정말이지 아무리 뭘 어떻게 해도 내가 저들을 주 앞에 인도할 수는 없다. 그저 나의 이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보는 수밖에.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주가 주실 것을. 설령 더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저들에게도 주의 선물을 주실 것을.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나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위인이라. 어떤 아이에게 어떤 서운함을 품다가도 이를 부끄럽게 하시듯 하나님이 보란 듯 일하신다.
그러니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 이 얼마나 값지고 평온한 마음일까? 내 안엔 간사함이 가득하니,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3).” 주께 아뢰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어떤 서운함이 또는 불편함이 주의 사랑을 증거하는데 걸림이 되는 사실을 안다. 심통난 사람처럼 더는 저를 생각하기도 싫어하는데, 불쑥 엉뚱한 일로 연결하시고 다시 그 마음을 덧입게 하신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이 쓸모없는 육신으로 살면서 뭘 얼마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구한다고! 내가 누구로 인해 쓰이는 마음을 없애기를 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음으로 주를 바라며 저를 대신하여 간구하게 하려 하심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임의로 그러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아신다. 가장 시의적절하게 딱 그 순간, 나로 하여금 다시 돌아보게 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마음이다. 축하한다, 하면서도 마음은 별로다. 얄밉기도 하고 뭐랄까 속상하기도 하여, 상대적으로 이 아이였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런데 하나님은 늘 보면 일을 이상하게 하신다. 이렇게 돼서 저렇게 하시겠지, 하고 보면 전혀 엉뚱한 데 관심을 두고 계신 것 같다. 나는 급하다고 아뢰는데 이틀을 더 유하시지 않나, 마음이 상해 있는데 성문 곁에 서신 채 기다리고 계시지 않나. 여전히 내 안에는 ‘~하였더라면’ 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이 심통난 것처럼 가득하였다(요 11:21, 32).
그리고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 나는 속단하고 나름의 판단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렇게 상을 주실 거면 줄 아이에게나 주시지, 싶은. 그렇게 공들여 말한 게 다 쓸모없는 것이니 요가에 심리미술치료니, 어디 무슨 기관에서 하는 무얼 한다느니. 그럴 거였으면 왜 그처럼 사람을 들들 볶듯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것일까?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벌써 냄새가 납니다.’ 실은 그게 내 안에 든 불신앙의 냄새였다. 아,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시 32:4).” 더는 생각하지 말아야지, 내버려둬야지, 하고 있는데 왜 내 속이 이처럼 고역인 것일까?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5).” 이게 다 나 때문이시다. 나로 하여금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누구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게 먼저 주의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6-7).” 그리하여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오늘 말씀은 나를 일깨우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9).”
아, 내가 뭣도 모르면서 그저 내달리려고 하는 말 같았구나. 자기 고집에 등이 휘는 노새 같구나. 이 내 마음을 재갈로 굴레로 단속하지 않으면 주의 인자하심을 바르게 누리고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10).” 온전히 주만 의뢰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