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도행전 13:49, 52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어떠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시다. 악이 어떠하든,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오늘 본문은 그렇게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을 알린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행 13:7).”
우리의 어떤 어려움 또는 악이라 해도 그 일환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되는 쪽으로 흐른다. 가령 아이가 어디 카페에서 글씨를 쓰고 있다고 그림과 함께 카톡을 했다. 쉬는 날이라 엄마가 늦잠을 자서 혼자 산책을 하러 밖에 나온 길이다. 나는 이처럼 묵상을 하다 그에 인용하는 성경구절을 이따 다시 읽으면서 글씨로 쓴다. 그렇게 한 권이 채워진 것을 아이가 보고 좋아라하여 읽어보라고 준 것이다. 그걸 보고 아이는 따라서 써보고 성경구절을 쓴다. 누구는 아이의 지능이 낮아진 것에 어려워하나 그것으로 아이는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하는 순수함을 떠올린다.
십자가보다 더한 비극이 또 있나?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결코 어렵고 힘든 것이 좋다는 소릴 하려는 게 아니다. 어디 어디 아픈 델 두고 어려움을 토로하라면 나 역시 서너 시간은 푸념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려움이 분명 가시이기는 하나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새 힘을 얻는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내가 사랑하는 말씀이다. 이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 아이가 조금 모자란 듯 ‘그런 걸’ 좋아라하며 따라하고 글씨를 쓰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내게 보여주는 것을 나는 기뻐하며 칭찬해주었다. 더불어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 마술사 엘루마처럼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 꼭 있다.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 13:8).” 그러할 때 누구는 주를 더욱 바라고 누구는 시들하여 도로 제 갈 길을 간다. 신기하지?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10).” 그로 인해서 바울은 주를 더욱 전파하니 그리스도시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12).”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이를 바울은 세례 요한을 들어 증거한다.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25).” 후에 이는 자신의 결의와 생의 모습이 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아침에 혼자 글방에 있는데 아이의 그런 문자는 나를 즐겁게 하였다. 점심나절에 분갈이를 하고 아내와 딸애와 국수를 먹었다. 둘이는 어디 좀 가려고 한 것을 내가 혼자 있기 싫어서 토요일에 가게 하였다. 어차피 돌아오는 토요일에 어느 아이 결혼식엘 가야 한다. 내가 갈 수 없어 아내와 딸애가 대신 가서 축하를 해주기로 하였다. 어떤 건 힘들고 어떨 땐 어렵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게 주를 바라는 데 유용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의 정의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어려움으로의 성취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2-33).” 이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의 설교의 주제이기도 하다(16-41). 곧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16).” 복음의 주제다.
이는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3:18).” 곧 주가 이루신다는 것, 오늘 본문 27절,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 된다. 이 일은 결국 하나님의 계획하심 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2:23).” 복음의 성취는 예수의 부활로 완성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3).” 아이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결코 걱정거리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으로 아이의 영혼이 살고 아이엄마가 간절히 주를 바란다. 아이와 함께 기도제목은 그러한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안 믿는 조부 조모의 구원이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바울이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말씀의 바탕이다.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행 13:35).” 곧 모세의 율법으로가 아니라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의 의로움이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9).”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며 나의 하루를 돌아보는 일은 귀하다. 마치 오늘을 위해 이 말씀을 기록해두신 게 틀림없어 보인다. 이는 모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 놀랍기만 하다. 어찌 이를 분간할 수 있을까? 주께서 택하신 자를 위한 것이다. 놀랍게도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우리 스스로는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는 그 일도 주의 것이다. 아이가 내 글씨 공책을 보며 글씨 연습을 한다고 따라 쓰는, 그 말씀이 곧 이루실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렇듯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나는 감격한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또는 상대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이 결국은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니. 이로써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놀라움이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경이로움이다(49, 52).
곧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그렇지. 이게 곧 복이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저에게 피할 수 있는 자가 복이었다. 주식을 하여 얼마의 이윤을 남기고 또 그것을 앞으로 어떻게 운용하여 사업을 번창하게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앞날의 계획은 어떠한지. 나는 누구의 원대한 꿈에 대하여 생소함으로 조금 부럽기도 했지만 크게 부럽지도 않았다. 그리 역사하시는 주의 영이 저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구원 사역이 다르고, 때론 하찮은 어려움에도 쩔쩔매는 나의 고달픔을 가지고 이뤄 가시는 주의 구원 사역이 다르다.
이 두 공통점은 그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또는 덩달아 따라할 것도 아니라, 각자 저마다에게 두시는 주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는 것이 참 복이겠다. 모처럼 밑에 동생이 필리핀에서 들어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부모님을 모시고 어디 경치 좋은 좌대낚시라도 갈 계획이다. 한편으로 부럽고, 부러워서 속상하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은 우울하다가도 또한 이제 그럴 수 없는 나의 처지로 인해 '그래서' 주를 바란다. 오늘 오는 아이들 수업을 그대로 진행하고, 내일 아이와 만나 성경공부도 그대로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묵묵히 주의 뜻을 구하고 바라는 일, 어쩌면 오늘 본문은 그것으로 사도들의 기쁨과 성령 충만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 그리 행할 수 있는 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처럼 주의 말씀을 따라가며 무던히 주를 신뢰하는 일이 복되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곧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 그러므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