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사도행전 15:16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편 36:7
앞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여러 말로 윤리적인 규범을 가르쳤다(1-29장). 그리고는 30장에 들어와,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1).”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 단정한다. 결국 실패하여 쫓겨 갈 것이고, 그 나라에서 이 일이 마음에 기억날 것이라는 소리다. 곧 우리는 결코 선할 수 없다. 스스로 순종하지 못한다.
말씀을 읽다 숨이 턱 막히게 공감하였다. 다 알지만 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악을 행하게 될 것이다. 선을 안다고 해서 그 아는 대로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프랜시스 쉐퍼의 재미난 예화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그 목구멍에 녹음기를 두셨다. 남을 훈계하고 지적하고 뭐라 판단하는, 상대를 향한 도덕적인 말들만 녹음이 되게 하셨다. 훗날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그 녹취록을 들으며, 안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대를 향해 말하였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던 그 판단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아무도 그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미 경고하였다. 다만 스스로 정한 규정에 맞게 살았던 삶에 대하여,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6).” 여기서 마음의 할례란 ‘새 언약’을 지칭한다.
예레미야는 그리 표현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할례는 실제 징그럽고 고통스럽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작업이다. 마음은 인격의 주체가 된다. 고상을 떨 게 아니다. ‘혼자 있을 때 하는 짓이 저의 종교다.’ 마음이 기우는 데 보물을 쌓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9).”
겉으로 보여지는 게 다가 아니다. 실은 열에 아홉은 거짓되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곧 마음의 할례란 거듭남이다. 더는 내 생각과 기준을 우선하지 않는다. 나는 어떠하든 결코 선해질 수 없다. 그래서 신명기는 다음 과정을 일러주신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신 30:2).”
말씀을 청종하라는 것. 부쩍 요즘 들어 말씀이 달다. 그 의미가 새롭다. 깊이가 다르다. 이처럼 생각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이끄시는 데가 주의 마음이다. 금요일이면 오후께 아들 녀석과 통화를 한다. 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어렵다. 퉁명스럽고 귀찮아하는 듯한 표현에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사업을 구상하고 그 일을 벌이는데 자기 고집을 우선하는 걸 보면 안쓰럽다. 한참 그럴 때여서 더욱 그럴 것이지만, 나는 부디 나와 같이 먼 길을 돌지 않도록 주께 바라고 구한다. 말씀 묵상하고, 꼭 중심에 두고 생각해라. 듣기 싫어해도 말한다.
그런 거 보면 오전에 와서 같이 성경을 읽고 식사를 하는 아이의 순수함에 반한다. 물론 약물 부작용으로 지능이 떨어지고 말이 어눌하고 기억력이 짧다고 다들 염려가 많지만, 그래서든 어떻든 그 근본 바탕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순진하여서 늘 배운다. 같이 요한복음을 한 장씩 읽으며 아이가 질문하면 설명해주고 그 가운데 말씀을 글씨로 써서 의미를 새긴다. 같이 탁구를 치고 점심을 먹고, 아이가 돌아간 뒤 설교원고를 마저 작성하였다.
그러다 이번 설교 본문에는 넣지 못했는데, 신명기 30장을 읽으면서 새삼 놀라웠던 것이다. 우린 실패할 것이다. 누구도 선을 이루지 못한다. 쫓겨 가 붙들릴 것이다. 이를 주께서 회복시켜야 한다. 1절 말씀의 요지는 그것이었다. 마음이란 게 참 제멋대로인 것 같으나 이게 또한 인격의 주체라. 그 마음에 무엇으로 채우고 사느냐, 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이번에 동생을 잠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거의 대부분이 무슨 주식 투자와 그 처남의 돈벌이에 관한 내용이어서 조금 불편했다. 아들 녀석도 요즘 부쩍 사업 구상 이야기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3).” 결국은 돌이키시고 돌아오게 하셔야 할 일이다.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다들 저마다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자신의 가치를 운운하며 사는 일이니까. 한데 그것으로 또한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이기도 하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4).”
누구도 선을 이룰 수 없다. 생각한 대로 살지 못한다. 말은 번드르르하나 그만큼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내 쫓겨 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게 된다. 사느라 정신 팔려 그 생이 온통 고단하다. 바쁘다 바빠. 대체 뭘 그리 열심을 다해 한 생을 정복하려 하는 것인지. 누구더러 뭐라 하고 저를 판단하고 도덕적인 기준으로 적용하던 그 적용으로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만 쫓겨 가 고통 가운데 실패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누구도 자기 판단에 흡족한 삶을 살지 못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5).” 하나님이 결국 나서셔야 한다. 이내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야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6).” 그리하여 우리 안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사 다시금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7-8).” 결과론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여러 번 말씀을 되새기며 아들애의 고집을 생각하였고 그 차가운 마음과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을 주께 아뢰었다. 필리핀에 떨어져 사는 동안 어느 일정 부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겠으나, 같이 끼고 살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유난히 자기 고집이 강한 아이였다.
나는 길게 날숨을 내쉬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께서 돌이키시고 회복시켜야 할 문제다. 기도밖에는 답이 없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6).” 주의 인자하심을 신뢰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늘 기도하고 주만 바라자. 나는 아이에게 당부하였다. 모자라도 괜찮다. 어디 아프고 병들었어도 괜찮다.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괜찮다. 시원찮아 속상해도 괜찮다. 이 육체는 신뢰할 것이 못 된다. 그저 다만 지나갈 따름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성경은 일갈한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6:5).”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고, 저를 부러워하고 따르지도 마라. 오직 주만을 바라자. 나는 마치 혼잣말처럼 아들에게 중얼거렸다. ‘혼자 있을 때 하는 짓이 종교다.’ 이 경구가 옳다. 마음이 가는 데 몸도 간다. 신뢰하게 되는 것을 찾는다. 즐거움을 거기에 둔다.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 생각이 오래 머문다. 그게 저의 종교다.
할례는 육의 몸을 벗는 일이다. 사과는 벗겼더니 겉과 다르다. 토마토는 겉에서도 그 속이 보인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 결국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심판이 임할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해결할 방도가 없다. 하나님은 망가진 나를 불러내어 마음의 할례를 행하신다. 그리고 약속을 주신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우린 선택해야 한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11).” 전엔 그처럼 불가능한 의무 같더니 이제는 가장 쉬운 선택이 되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 말씀만 붙들자. 아이가 성경을 같이 읽다 이상한 행동을 하면 순간 나는 얼음이 된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셔서 아이엄마가 아침 일찍 달려갔다고 했다. 나는 덩달아 긴장한다. 숨이 가쁘고 어떤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 보잘것없는 나를 세우신 까닭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말씀만 붙든다. 달리 붙들 수 있는 게 없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16).” 이 명료한 말씀 앞에 앉는다. 아들애의 고집스러운 마음에도 들려지기를 기도한다. 같이 성경을 읽는 이 아이에게도, 그 상한 마음의 아이엄마에게도, 이제는 멀리 떠나간 아이들에게도.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시 36:5-6).” 주가 구하시지 않으면 도대체 헤어날 길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7).” 이것이 나의 고백이 되게 하심을.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생을 살고 있는 가운데,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