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전봉석 2018. 6. 11. 06:55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사도행전 17:28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편 38:15

 

 

 

아이 때문에 울컥,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마치 저 아이를 나 때문에 보내신 것 같다. 같이 점심을 먹고 아이를 돌려보내고 오는 길에 아내에게 말하였다. 아내 또한 마음이 뭉클하다고 하였다. 아이의 순수함이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데 있어 재고 따지고 꿍치는 마음을 없이 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오늘 말씀을 되뇌다 주를 힘입어 기동하고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5).” 주를 바라는 데 다른 이유나 목적이 없다. 아이에게 대표기도를 시켰다. 나만 감동이 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그러라고 아이를 보내셨다. 내 안에 저처럼 순수하게 주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가? 늘 바라고 구하는 게 먼저고 그것을 위해 주를 섬기기 일쑤이지 않나! 아이의 순수함이 부모의 걱정이 되고 앞날에 대한 한숨일 수 있겠으나, 그처럼 대표기도를 부탁하였을 때 거리낌 없이 순수하게 주께 기도하는 내용이 아름다웠다.

 

남을 의식해 더 큰 교회 뒤에 숨은 아이엄마나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그럴 것이다, 하는 아이이모나 과연 그들 마음 안에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신 저 아이의 존재이유를 알기나 할까? 단지 애물단지처럼 걱정과 근심의 대상이기만 할까? 아이는 어디 주차장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 것 같다며 현실 이야기를 하였다. 아마도 주변 식구들의 염려 때문이었겠다. 내가 나서서 뭐라 할 게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앞에 마음이 안 좋았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 같으나 가까이 가서 등반을 해보면 여러 개의 봉우리가 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쩌면 나는 한 다리 건너에 있어서 아이엄마의 한숨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물둘. 다 자란 아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다음 주에 다시 지능검사를 하여 장애판정이라도 받게 하려는 것인지. 아이의 짧은 설명을 추론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아내도 딸아이도 나도 아이와 같이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알 수 없는 감동이 있었으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먼저는 무모함이다. 어른이랍시고 철든 사람의 눈에는 아이의 순수함이 어리석게 여겨질 것이다. 안 믿는 자의 눈에 우리가 천국을 바라며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도 그러하지 않겠나? 뜬구름 잡듯 얼토당토않은 소리로밖에 더 들리겠나? 다음은 누가 건사해야 한다는 걱정 때문이다. 아이 혼자 이 사회를 어찌 살아가겠나, 하는 염려다. 나름 스스로 밥벌이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걱정이겠다. 아이를 보면 어디 취직이라도 하든 학업을 계속 하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당위적인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과연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나 한 것인가? 마치 스스로는 자기 앞가림은 하고 산다고 여기고 있어서들 그리 염려들 하나? 과연 그러한가?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미 7:14).” 주가 먹이시지 않으면, 그의 건사하심을 신뢰하지 않으면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뭐 있겠나!

 

그러니 그 속에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렘 5:24).” 교회는 가도 한숨만 나오고 어디 숨어 남들 모르게 혼자 애원하는 신앙이었으니, 그게 과연 주를 바라는 마음에서일까?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문득 우리는 오늘 우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찬양하였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주가 이루시는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아이엄마는 아이로 인해 어쨌든 주를 찾고 그 도우심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 저가 언제 그처럼 주를 바라고 의지하였던 적이 있던가? 아이의 일로 염려하지 말라. 마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었다. 주가 이루신다.

 

그 앞날에 대하여 하나님은 때로 일일이 답하지 않으신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우리는 이를 묵상하며 붙들고 주를 더욱 의지할 따름이다. 성경은 늘 은혜를 드러내신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롬 4:6).”

 

우리가 무얼 하여 이룰 수 있는 게 구원이 아니다. 그 일이 되어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어떠하든 저는 선하시다. 지금은 이 상황이나 형편은 형언할 수 없이 우리를 두렵게도 하지만 그보다 크신 이가 이를 주도하신다. 불쌍하고 안쓰러워서가 아니야! 아내는 아이로 인해 뭉클하였던 마음에 대해 그리 덧붙였다. 어떤 마음이었을지, 내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잘나서 교회를 떠나고 나름의 판단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 드는 게 늘어나는 세상에서 오롯이 주만 바랄 수 있는 축복이었다.

 

오늘 바울의 증언이 그리 들린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 단도직입적으로 자기들의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상징물을 높여 귀히 여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름의 기도나 전도나 봉사나 헌신을 마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로 삼으려 드는 게 아닌가? 과연 그 열심을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훗날에 주 앞에 섰을 때 그것으로 잘하였다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하겠는지.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 우리 안의 그러한 수고와 열심도 결국은 주를 더욱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28).”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예수를 본다. 오직 하나님을 우러러 성부의 뜻으로만 기쁨을 더하시고, 성부는 성자의 뜻으로만 기쁨이 넘쳐나신 것이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주의 긍휼하심이다.

 

곧 우리의 약하고 걱정거리인 것을 들어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잘났다고 여기는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8).” 왜 그러시는 걸까?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 이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간과하였으나 이젠 아니다. 회개해야 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시 38:1).” 주 앞에서 나의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일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4).” 이는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5).” 잘난 줄 알았던 자신들은 어찌 살아왔는지, 살아가고 있는지, 이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게 더 큰 문제라.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6).”

 

이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