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편 44:26
어떤 불편함, 마음의 부담이 외형적으로는 고난으로 가중되고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나, ‘그것으로’ 주의 일은 흥하여져 간다. 하나님의 영광의 역동성이랄까. 우리에게 더하시는 고난은 결코 괜한 게 없다. 그냥 주어지는 안타까움도 없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일찍이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정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훗날 고백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우리의 고달픔으로 우리는 주의 은혜를 더욱 바란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그리스와의 사귐이 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사 44:24-28).” 말씀 앞에 앉아 그 의미를 새긴다.
좋은 날씨의 토요일이라 아내는 어디를 가고 싶어 했고 나는 그럴 수가 없어서 공연히 미안하였다. 그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같이 점심을 먹고 휘적휘적 걷다 돌아왔다. 한껏 멋을 내고 나왔던 아내는 심통이 났고, 어쩔 수 없는 나는 시무룩하였다. 여름이 되면서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어려워, 나의 이런저런 구구함에 대하여는 지겹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열거하여 본들 소용도 없는 것이라, 이것으로 주를 구한다? 다른 더 좋은 수가 없으니까! 잘 산다고 잘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오늘 본문은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 그것으로 ‘담대하라.’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신다. 결국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주의 섭리 앞에 앉게 하신다. 이 모든 역사의 주체자로서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결국은 주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그 목적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게 하신다. 일부러 죽게도 하시고(요 11장, 나사로의 죽음처럼),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기어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입증하셨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이것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니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또 얼마나 주를 멀리하게도 하는 것인지.
과연 우리에게 장래의 소망이 없었다면 지금의 고난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바울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분명한 매뉴얼이 없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여야 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한다. 우리는 어둠에 속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다가올 장래의 일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제하고 말씀을 굳게 붙든다. 영적으로 잠들면 주의 날이 곧 다가올 것을 망각하고 산다. 남들처럼 사는 게 기준이 된다. 이를 복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 돈을 버는 일에서나 누구를 마주하는 일에서나, 무엇 때문에 사는가? 왜 여기 있는가? 어떤 소망을 꿈꾸는가?
그 일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곧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10).”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11).” 결국 최후의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의 삶이 복된 것은 이를 알면 알수록 주를 더욱 바라고 주와 함께 사는 것으로 모든 확신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뿐 아니라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이다.
이를 가지고 서로 격려하라는 것,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4:13).” 곧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5:11).”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을 회피할 때 동시에 주의 은혜도 그만큼 맛보지 못하는 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상속으로 받은 자들’이다.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 저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이 상속된 것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남들처럼 사느라 잘 사는 것으로는 어림없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 명료한 진리 앞에 무심할 수 없다. 고통을 회피할 수만은 없다. 의도된 섭리는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
책상 아래에는 난로를 켜놓고 머리 위로는 선풍기를 돌려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 아내는 어디 ‘중국인 거리’라도 다녀오자고 하였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래저래 마음은 어려운데 그런 걸 또 누구에게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니 내가 붙들 것은 오로지 장래의 희망이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는 것은 마치 조그만 씨앗을 땅에 뿌리는 일과도 같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고전 15:37).”
나의 이 보잘것없는 어려움이 대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싶은데, 그것으로 주를 바람이다. 아직 젊으니까 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그럴 땐 모른다. 절박할 게 없다. 절실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곧 때가 이르리니 하다못해 이 땅의 생을 마감할 날도 곧 다가올 것이다. 이에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나는 기도한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주의 약속이 있지 않나! 우리를 건지실 이는 예수시다. 나의 노력이 또 수고가 아니다. 누구처럼 사는 게 아니고, 저들을 부러워할 것도 없는 일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의 믿음이 내 것과 같고 저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내 것이 되었다. 약속을 상속받은 것이다.
곧 하나님을 상속하는 일이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고통과 어려움이 다 그만한 의도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 묵상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행 23:27).” 그렇게 로마로, 이방 나라로, 아시아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고!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라. 뜻이라. 계획하심이라. 그렇다면 이를 붙들거나, 어렵다고 회피하거나.
주는 나의 마음의 비밀을 아신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0-21).” 주 앞에 무던할 수 있기를. 묵묵히 주만 바라며 나아갈 수 있기를.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주의 말씀뿐이오니,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