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사도행전 25:19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재판 때마다 등장하는 헤롯 일가는 세상의 권력과 힘을 상징한다. 아기 예수 때 2세 미만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던 헤롯대제(마 2:16), 예수님 재판 때의 헤롯 안티파스(눅 23:8),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할 때의 헤롯 아그립바 1세(행 23:1-2), 그리고 30년 후인 오늘 바울을 재판하고 있는 헤롯 아그립바 2세(24:23). 저들은 같은 셈족의 유대계이면서 로마에 빌붙어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저들의 관점은 철저하게 방관자이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행 25:19).” 실제 자유하지 못한 이들이 스스로는 자유하다고 하는 행세가 방관이다. 이는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 의도적이며 자기 주도적으로 성령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경고를 우리는 받았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말씀과 멀어지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스스로 세상에 속한 것을 바라고 그것에 타협한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람으로의 의무를 무시한다. 자기만족을 우선으로 삼는다. 성령을 거절하는 데는 스스로 자신에게 자유를 부여하고자 하는 일이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이를 주께서 찾으심으로 회복시키신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사 57:18).”
노인은 며칠 새에 핼쑥해졌다. 인생에 대해 다들 통달한 사람처럼 구는 건 나이든 자들의 특징인가. 나는 더 어려워지기 전에 주의 이름을 바랐으면 하는데 저는 휑한 눈으로도 여전히 지난날을 운운하며 자신이 어찌 살아왔는지를 회고하고 있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더듬어 그때의 서러움을 어찌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자부하는 것이다. 새삼 또 떠벌이듯 길어지는 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사람의 공통된 모습, 헤롯 일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신들은 무관하다는 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하려 드는 것을 말이다. 어디서 뚝딱, 생겨난 게 아니라면 그 존재의 준엄한 가치를 그저 막연한 구설로 어쩌다 그리 되어진 일로 여겨서야 되겠나. 오히려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사느라 억매여 평생을 구구하게 살아왔으면서도 여전히 그 삶의 구차함을 모른다. 오히려 미화한다.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이 온전히 자기 힘으로 된 줄 안다.
주가 저를 아침마다 보내시는 덴 다 이유가 있으실 텐데. 왜 저이가 그처럼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하는 것인지. 건강 잘 돌보고 스스로 운신할 수 있을 때 주 앞에 나아오기를 은연중에 권하였다. 그럼 저의 태도는 늘 한결같이 방관자의 입장에 선다. 노인이 돌아가고 뒤미처 아이가 왔다. 여느 날보다 피로해보였고 시무룩해하였다. 기억을 잘 못해 늘 무엇을 찾고 어떤 것을 잃어버릴까 염려한다. 8월에 있을 청년부 수련회를 이번 주간으로 알고 있기도 하였다. 같이 요한복음을 읽고 그때마다 아이의 질문을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가. 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이와 같은 시간을 보내게 하시는가. 나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아이의 횡설수설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려주시기를 바랐다. 극과 극이라. 앞서 온 노인의 완고한 자기주장에서 뒤에 이어온 아이의 막연하지만 간절한 바람에 이르기까지. 다른 날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자주 시선을 떨구었고 딴소리를 하여 사람을 긴장시켰다. 점심으로 냉면을 먹으러 갔는데, 가뜩이나 점심시간에 몰린 인파로 나 역시 긴장을 한 터에 아이까지 넋을 놓곤 하여서 나는 쩔쩔맸다.
아이를 전철역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어떤 막연한 답답함으로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내가 좀 멀쩡하면 좋을 텐데, 하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런 가운데서 그러므로 주가 주시는 위로를 느낀다는, 이 아이러니함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이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그러기 위해 나를 아프게도 하신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2-3).” 주의 일하심은 때로 당황스럽다. 내가 좀 의연하여 아이를 굳건하게 지켜주면 좋을 텐데. 노인에게는 좀 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 저를 주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내 안에 답답함이 있어 나는 그래서도 주를 바란다. 막연하여서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맞는가? 하는 회의가 일 때도 여러 번이라. 나는 과연 이 아이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저 완고한 노인의 떠벌임을 들어주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공연한 일은 아닌지. 괜한 수고는 아닐지. 그러나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 선명하여질 것이다.
오후가 되어 다들 사무실을 비우고 혼자 남아 소파에 누웠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깨어 아이를 맞았다. 이번에 상을 받은 아이다. 그냥 학교 끝나고 오고 싶어서 왔다는 말에 그 또한 신기하였다. 시험공부도 해야 하고, 새로 시작한 춤도 배워야 하고, 이달 말에 보내야 하는 원고도 써야 하고, 나름은 바쁜 아이의 일정을 이해한다. 그래서 이걸 쉬고 저걸 빼고 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아이에게 어느 것도 빼거나 쉬지 말고 그런 가운데 좀 바쁘게 움직여보라고 하였다. 아이가 돌아가고 그렇게 말한 나의 말이 내게 향한 게 되었다.
누구 때문에 무엇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드는 마음에 대하여 내가 구구할 건 아니다. 주가 이루어 가신다. 나는 다만 여기에 있을 뿐이다. 공연한 책임감이나 어떤 의무에 겨워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더는 어떤 성취나 성공을 목표로 하는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자꾸 내 안에 어떤 결론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일을 바라니까 조바심이 인다. 아이가 나아지길 바라고, 노인이 돌이켜 주 앞에 나아오기를 바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 염두에 두고 주께 구하고 바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으나,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만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그 일’의 한 부분일 뿐이다. 결코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고 기사를 행하여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굶주림을 해하여 주려고만 오신 게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오히려 사도행전의 다른 목소리는 오늘도 예수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1-2).” 자고로 자꾸 ‘생각이 구름 위를 떠돌면 땅을 딛고 선 발은 잊게 되는 법이다.’ 오늘 내게 맡기신 일은 뜬구름 잡은 게 아니다. 현실을 딛고 선 일이다.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로 택하신 이에게 명하시고 앞으로도 행해야 하는 일에 대한 기록이다.
그 예수님의 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예수께서 하신 일보다 큰일이란 무얼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따른 주어진 말씀으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3-14).”
예수를 믿는 자는 그의 일을 한다. 이 확고부동한 진리를 되새기게 하신 하루였다. 그것이 막연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 같다 해도, 또는 어설프기 이를 데 없어 이게 과연 맞나? 싶은 회의가 몰려들 때도! 그러게 오늘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앎으로 그의 일을 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내 일이 아니다. 그가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 믿음으로밖에 다른 구원은 없다. 내가 저를 어찌 설득하여 돌이킬 수도 없고, 무얼 어찌 잘 건사하여 아이를 낫게 하고자 하는 목적도 아니다. 다만 주의 일이다. 믿는다는 삶의 증거는 우리가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롯 일가’의 삶과 다른 점이다. 세상과 다른 이유다. 그 유일한 길,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이렇게 말씀 앞에 서는 것뿐이다. 말씀이 주도하실 것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주가 이룩하시는 세계에서 사는 일이다. 천국은 이미 실행 중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