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3-24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편 52:8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우리가 죄 아래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늘 아찔하다. 그 가운데서 나를 주관하셨다는 사실 앞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주께서 주도하시는 문제이다.
누구도 깨달을 수 없고 찾을 수 없이 다 치우쳤다.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의연하여 주만 바라며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생각보다 아이는 잘 대처하였다. 저의 사정을 대충 알려 서로들 주의할 것을 미리 당부하였다. 어디로 나가 점심을 먹는데 시간이 들어 간단하게 점심을 시켜먹었다. 그러는 동안 또래 아이와 같이 탁구를 치며 시간을 더했다.
죄 아래 놓인 사람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뭐라 해도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우선하는 경우가 있고, 먼저 주를 바라며 그 가운데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2-3).” 나는 어떠한가? 두려워하며 살펴보면 다를 게 없어 두렵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게 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대로 행할 뿐이다. 아이에게 마음을 두게 하시는 이가 또한 아이로 더불어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도 하신다. 손위 처남형님과 늙으신 장모, 그리고 조카아이가 같이 와서 주일을 지켰다. 한껏 더워진 날씨에도 아이는 생각보다 잘 적응하였고 좋아하였다. 나오지 못한 아이들을 두고 마음을 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주의 벗이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 41:8-9).”
주가 나를 택하셨다. 싫어하여 버리지 않으셨다. 나를 주의 벗이라 이르신다. 그 친밀함에 대하여는 어떤 상황과 사실들 앞에서도 든든한 어떤 신뢰의 관계가 형성된다. 하나님은 친구로 우리를 마주하신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이런저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또는 힘에 겨워 두려움이 먼저 앞서는데도, 그럼에도 허물없이 주께 아뢰고 고할 수 있는 일이다.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우리를 대하고 이끌어 생각과 말과 생활을 인도하신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주 앞에 무던할 수 있기를. 누가 어떻다고 해도 묵묵히 주만 바라며 개의치 않는 일을 오늘 본문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의로울 게 없는 나로 의롭다 하시는 이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그렇게 살 수 없을까?
하나님께 더욱 철저히 의존하게 하심이다. 이는 필연적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저만치 한 걸음 떨어져서 말씀을 듣는 데야 별 수 있나? 오히려 아이의 과장된 몸짓과 마음이 복된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그 앞에서 진실하기를 소원한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그러므로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시 31:23).” 이렇게,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으로 충분하다.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아이가 돌아가고 같이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데 급 피로감이 몰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말씀만으로 족한 삶이 복되다. 구구절절 자기 의견을 달고 생각을 더해서 따지고 보태는 말들이 피곤하다. 자기 말과 자기 생각에 겨울 때 은연중에 의심이 든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사 50:2).”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줄 아는 게 실력이다.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와 같은 마음을 조성하시는 일,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잠 22:25).” 누구를 보고 어떤 말을 더할 때 앞서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복이었다. 다들 보면 자기 말에 겨워 취한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우리에게 두시는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요 3:11).”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뭐라 다 말할 수는 없으나 나는 저들이 다 돌아가고 기진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같은 층에 있는 교회 목사 내외를 만났다.
몇 층에 교회가 있는데 또 몇 층에 교회가 들어온다고 말하였다. 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겠으니,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 일이라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주변 이야기에 마음을 둘 여력이 없었다. 어쩜 그럴까? 나야말로 그릇이 그 정도라, 한 영혼 한 영혼으로 힘에 부치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어서 말이다.
주의 사랑으로 버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이런저런 해석과 말의 보탬을 경계한다. 사탄의 역사가 어떻고 하는 소리는 상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내 안에 어떤 불편했던 마음이 손위처남의 그런 시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얼 상당히 성경적으로 해석하려는 듯 부연하는 말이 피로하였던가보다. 공연한 말로 누구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어, 우리끼리 있을 때만 그런 소릴 하시라 넌지시 이르기도 하였다.
너무 과하다.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마음을 너무 붙들고 열심을 다하려는 것도 성경은 경계하신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성령을 운운하고 사탄을 들먹이는 일은 조심스럽다. 사용하는 용어가 거슬려 나는 마음을 주의해야 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이를 무슨 특권이나 있는 것처럼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나은 게 무언가? 모두 다를 게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 나를 주 앞에 세우시는 것은 전적으로 주의 은혜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오늘 말씀 앞에 나는 다시 주목한다. 행여 말이 앞서고 어떤 해석이 분분하여 쓸데없는 용어와 의미부여로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는 누를 범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저 나는 주의 집에 있는 감람나무라.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주의 인자하심으로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지나친 열심이 우리 영혼을 해칠 수도 있다. 주의 의는 결코 차별이 없으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주만 보고 가자. 말씀만 붙들고 서자. 행여 어떤 해석도, 모자란 어떤 추론도 말고 주시는 바 하루하루 주 앞에 살자. 혼자 생각하였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