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4
중1 여자아이가 새로 왔다. 정말 이상하다 싶게 ‘또 힘든 아이’였다. 성적은 바닥이고 그 가정은 온전하지 못하였다. 첫날부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하니, 아내는 우리가 모여 저녁에 기도회를 할 때 제목으로 내어놓고 아이를 두고 주께 구하였다. 일부러 그러시는가, 싶게 어쩜 그렇게들 어려워하는 아이들일까? 우리의 기도는 그래서 더욱 주의 마음을 구하고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힘에 부쳐 주를 바라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게 하시는 이가 또한 그것으로 주를 찾게 하신다.
중3 아이 원고를 출력하고 몇 차례 첨삭해서 주었다. 아이보다 아이 글을 더 많이 읽은 것 같다. 분명히 불행한 가정이고 그 형편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서로들 튕겨져 나가지 않는 것은 사랑을 완성해가는 과정일 거라는 주제였다. 징징거리면서도 하려고 하는데 모르는 체 할 수 없어, 나는 그와 같은 글쓰기가 아이의 마음을 위로 하고 주 앞으로 나올 수 있기를 소원하였다. 보면 참 고집이 세다. 징그러울 정도로 무디고 답답하다. 어쩔 땐 신물이 다 올라올 정도다.
우리는 같은 내용의 기도를 얼마나 더 자주 빌고 아뢰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침에 저질렀던 죄를 점심 때 저지르지만 그럴 때마다 주께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각오를 하지만 돌아서기 무섭게 또 어떤 미움이 시기와 질투가 나를 사로잡는다. 그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는가, 싶은데 언제쯤 더는 그 문제로 씨름하지 않고 있다. 늘 같은 내용의 이야기 같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주가 주시는 자유를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는 진행형이다. 죽을 때까지 이루어져가는 화평이다. 내가 하려고 할 때는 어림없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우리를 위해 빌고 기도하시는 이가 계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린 그저 흉내만 내듯 주께 아뢰고 구하는 정도이지, 내가 선을 이룰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민감하게 주께 아뢰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됐다고 단박에 온전한 사람은 없다.
그런 우리를 주가 보호하신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구원을 받았으니까 구원을 이루어간다. 우리에게 붙이시는 이 아이들의 면면을 보면 이제 그 구조를 알 것 같다. 인생에 있어 가장 예민할 수 있는 시기에 그와 같이 상한 심령으로 우리 곁에 보내시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일이다. 주의 마음으로 긍휼히 대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조현병 이력이 있는 누가 대로에서 사람들을 ‘묻지마 폭행’을 가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이제는 남 일 같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더 보듬고 주의 사랑으로 대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이 나를 이끄신다. 또 중딩 아이들이 학교 폭력에 휘말려 누구를 린치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왕따로 지내는 아이를 떠올리며 더 마음이 기우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주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노인은 다른 날과 달리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애환에 젖었다. 창밖으로는 무섭게 장맛비가 퍼부었다. 실내는 고즈넉하였고 그의 신세한탄은 끝이 없을 듯하였다. 다 알면서 저러는데 나는 그저 듣기만할 따름이다. 하필 손아래 동서가 목회를 하다 불미스러운 일로 그만두게 되었고(전에 언제 여자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다) 배우고 아는 게 많아 그런가, 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며, 노인은 저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일을 거절하는 핑계로 삼았다. 다들 참 한 고집들 한다. 어쩌면 자기 고집이 광야라. 누가 내몬 게 아니다.
그렇듯 죄에 발목 잡혀 사는 모습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살기를 싫어하면 모든 게 다 하나님 탓이다. 동서가 그렇다는 게 저가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유가 되나? 목사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싫은 것이다. 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가 어디에서 잃어버린 구원의 손길이 보이는 듯하다. 중3 아이도 글에서 종종 하나님을 운운하는 걸 보면, 다들 그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있다.
이에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지표를 밝혀주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이 은혜로 들어감을 얻었는데 여전히 주저하는 까닭은 전적으로 자기고집이다. 그 아집을 꺾지 않는 이상은 별 수 없다. 늙으신 마나님의 몸에 적신호가 들어오고 본인의 건강에도 벌써부터 이상신호가 감지되는데도 설마, 하는 것이다. 다 그렇지 뭐, 하며 치부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 찾아와 이런저런 말을 하게 하시는 걸 보면, 나는 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는 이제 죽을 때까지 이 말씀 안에 거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 때론 오늘이 너무 고단하고 힘에 겨워도 그것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로 들어감’이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래서 누굴 안쓰러워하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주께 대신 고하는 일, 그래 맞다. 믿음의 방패로 하루를 견딘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엡 6:16).”
내 안에 이는 어떤 회의와 갈등도 또는 누구의 경멸어린 눈총과 오해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궂은 날씨 탓에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어려웠다. 혼자 서성거리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 이름을 부르는 횟수도 늘어난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험하고 거친 삶 가운데서 증명되는 것이다. 다 차치하고 그러니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는 수밖에! 아이에 대한 염려나 근심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주가 아니시면 단 한 순간도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렇지. 그와 같은 믿음의 방패로 우리는 환난을 견딘다. 인내할만한 충분한 가치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연단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여 정금같이 나오게 할 것이다. 이에 으뜸이 소망이다. 우리의 연단은 이내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다.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이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로 하여금 저 아이들을 대할 때, 저이의 신세한탄을 듣고 또 들을 때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럴 때 주께서 날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진노의 자녀일 때, 뭐라 입에 담기도 민망하고 께름칙하여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자의 증거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뜻이 계셔서 ‘저런 사람들’을 우리 곁에 두신다. 오게 하시고 붙이시고 마주하게 하신다. 내가 저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우리는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 주께 아뢰고 고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다는 것. 그럴 수 없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저들을 위하여 우리로 주 앞에 서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9).”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음을 믿는 일이다. 날 위해 죽으셨고 내 안에 내주하심을 입증하는 삶이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이를 시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5-6).”
어렵고 힘든 처지에도 누가 누굴 위하고 바란다는 게 그 증거다. 그리 되게 하시려는 게 주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잘난 줄 알고 그리 자랑을 일삼다가도 살아온 날을 회고하며 늘어놓는 말을 듣다보면,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는듯하다. 인간답지 못한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몰골을 그려서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게 한 것처럼. 이성복 시인의 <그날>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 역설적인 표현에서처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이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주께 아뢸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2).” 곧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