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이건 경우의 수가 아니라 공식이다.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다. 아이엄마도 교회를 다녔었다. 그 친정에는 누가 목회를 한다. 자신도 ‘이미 다 안다.’는 식이다. 그리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마치 아무 것도 아닌 짚덩이처럼 여기거나, 지나치게 애지중지하여 입안의 혀처럼 제 것인 줄로만 안다. 에이 설마, 하고 아이엄마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가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다.’ 싶었던 것이다. ‘전에는’ 다들 믿었던 이들이어서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말씀 앞에 앉아 등골이 오싹해진다. 오늘 본문은 되묻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이보다 그 삶이 더 황폐한 건 당연하였다. 천국은 멀고 현실은 가까우니, 당장에 돈이 목줄을 조이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동기 전도사의 어려움도 거기에 있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그래도 계속 그 길을 갈래?’ 하고 묻는 것 같다.
열에 아홉은 돌아섰고, 그 이유는 너무 먼 천국 대신 당장 가까운 오늘에 연연하느라 그리 되었다. 성경은 이에 따른 답을 제시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죽으신 이가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3).” 하고 다시 물으신다. 성령 세례다. 이로써 나는 죽었다. 그리고 나는 산다. 자신에 대하여 죽을 때 그리스도에 대하여 산다.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지만, 그걸 보시고자 주가 인도하신다. 돈이 늘 현실적인 길목에서 우두머리다. 대장 노릇이라 비참하고 초조하다. 아무리 고상하게 돌려 말해도 그 처지가 돈 때문이다. 왜 아이엄마는 아이에 대해 그리 미움이 쌓였을까? 나름은 번다고 버는데 늘 쪼들리는 살림에도 애한테 퍼부은 돈이 얼만데 그 지경이냐, 이 소리다. 훗날에 자신이 주 앞에서 들어야 할 소리를 아이에게 퍼붓고 있는 것이다. 새로 온 중1 아이의 엄마는 여간이 아닌 모양이다. 아내는 저이와 통화하다 기진하였다. 저는 늘어지게 현재 자신의 비루함을 애 때문인 듯 원망하는 것이다. 아무리 돌려 말해도 결국은 돈 때문이었다.
은혜를 잊으면 전보다 더한 지경에 들 수밖에 없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두려운 일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 나는 이 공식 앞에서, 나를 향하신 주의 강권하심 앞에 새삼 감사하였다. 파산이 오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 공황에 이르게 하시면서도 신학을 하게 하시고, 울면서도 꾸역꾸역 목회를 시작하게 하실 때는 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한다. 그 고난이 은혜인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만큼 내가 완고하였던 것이다.
나름의 길을 찾아 떠난 이들을 종종 보지만 저들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다. 기껏 목회자로 일생을 잘 사는가했더니 빚더미에 앉았거나, 어디 건물 청소를 하며 지내거나, 교도소에 들어가 앉아거나. 저들의 공통점은 양다리였다. 목회를 하며 돈을 굴렸다. 어디 기웃대며 사람을 좇았거나, 스스로 노년을 대비하던 거였다. 이는 정해진 노선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오늘 본문은 일갈한다. 그럴 수 없다! 자아가 죽어야 자신이 산다. 자신이 죽어야 그리스도가 산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렇지 않고는 이 길 못 간다. 주를 믿는다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루하고 처량한지 모르겠으나, 나의 부모는 그러하였다. 가령 어린 막내 동생이 병들어 죽어가는 데도 병원에 데려갈 돈도 없고, 잡힌 집회를 위해 기도원 맨바닥에 아이를 내려놓고 ‘죽이시든! 살리시든!’ 하고 주께 맡겼던 결과이다. 우리 사남매가 오늘 모두 주의 종으로 쓰임 받는 덴 다 우리 부모의 무모하리만치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6:14).” 엄밀하게는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기업이다. 주가 맡기신 것뿐이다. 내 몸을 내게 맡기시고, 오늘의 이 환경과 여건을 맡기신 것과 동일하다. ‘저런 아이’를 내게 맡이심도 같은 원리다. 어쩌겠나? 그럼 나는 이를 도로 주께 맡기든지, 내가 어찌 좀 아등바등 할 때까지 해보든지!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답을 제시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그리스도와 합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곧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너무 잔혹한가?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세상은 더하다. 안 믿는 자들의 부유함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열한지,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모든 소재가 그러하다. 속고 속여야 하고, 짓밟고 짓밟혀야 하며, 잔혹하고 잔인해야 한다. 이는 모두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그 속은 다 문드러진 삶이었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가장 쉽다고 이제는 감히 확신한다. 믿는 자로 사는 게 제일 쉽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완전 새로운 세상을 사는 일이다. 우리의 부활은 저 멀리 죽음 너머의 육신의 부활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오늘을 사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천국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성경의 일침은 변함이 없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믿는 자로 산다는 일은 그래서 표가 난다. 곧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리 소망한다.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그리 바란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그러니 날마다 회개다. 매순간이 기도다. 돌아서기 무섭게 내 안에 이는 염려와 근심이 그렇고, 누구를 부러워하다 드는 시기와 질투가 그렇다. 주를 바라다 회의와 갈등이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게 드는 원망과 낙심이 또한 그렇다. 주 앞에 내려놓지 않고는 내가 이고 갈 자신이 없다. 그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게 이처럼 죽음 너머의 영생을 바라며 우울한 나날을 참고 사는 게 아니다. 사는 게 지옥인가? 결코 ‘억지 춘향’이 아니다. 그러자니 그 모양이 얼마나 기형적인지 모른다.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동동거리고, 주의 길을 간다고 부르심을 운운하면서도 여느 장사치와 다를 바 없이 돈돈거리는 꼴이니! 그 속이 남들보다 배나 괴로운 건 당연한 일이다. <천로역정>의 '기독도'가 길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짐을 이고 진 꼴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런 걸 여전히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으니, 힘에 겨워 제풀에 주저앉고는 ‘나도 예전에 믿던 사람이다. 교회를 다녀봤다.’ 하는 것이다. 저는 필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곧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이는 장래의 일이면서 오늘의 일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이를 설교 원고로 생각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안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로써 나를 ‘예수와 함께 살리신다.’ 곧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장래의 일로 현재의 일이면서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이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삶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렇지!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죽었고, 전혀 다른 내가 산다. 마치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내가 저들에게 나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삶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마치 모든 밥상 위의 음식은 죽음으로 새로 태어났다. 시금치가 시금치 그대로 살아서는 시금치가 아니다. 콩나물이 여전히 콩나물이어서는 콩나물이 아니다. 먹을 수가 없다. 먹일 수도 없다. 배추가 죽어 김치가 되었다. 벼는 베어져 탈곡이 되어 쌀은 이내 죽어서 밥이 되었다. 온갖 재료는 찧고 빻고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6:14).”
나는 오늘 말씀 앞에 앉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 저 밥상의 음식들처럼,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이는 실패가 아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성경의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무력하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으나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는 그와 함께 산다. 내 주제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으나 주께서 ‘저 아이’를 내게 보내심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에게 쓰이는 나의 시간과 말과 마음이 모두 헛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나는 저에게 전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가 되는 밥상이다. 그리스도의 인의 삶이란 날마다 주의 성만찬의 날들이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내가 누구인지, 환난으로 인내를 이룬다. 인내로 연단을 이룬다. 연단으로 소망을 이룬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여전히 그와 같은 삶을 살며 모르고 있는 이를 위해 우리를 여기에 두시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것도 그것이다. 이제 초딩 5학년 여자아이가 손목을 긋고, 해시태그를 붙여 자해, 너무 좋아, 하는 따위의 말을 SNS에 올렸다.
우리는 가슴이 철렁하여, 아이를 위해 기도뿐이라. 아이엄마에게 알려야 하나? 아이를 불러 뭐라 일러야 하나?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무서운 세상이다. 들으려 하지 않고 뭐라 하면, ‘나도 다 안다. 전에 나도 교회를 다녔다.’ 하며 큰소리친다. 아,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다른 길이 어디 있나?
우리는 저들을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시 55:1).” 이는 내가 속상해서, 죽을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4-5).” 때론 어디 멀리 도망쳐서 나는 알지 못했다, 말하고 싶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6).” 아무도 없이 숨고 싶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7).”
이렇듯 내가 힘에 겨워 주를 바랄 때, 오늘 말씀과 같은 확고부동한 말씀 앞에 아멘할 따름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