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로마서 7:22-23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11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이에 따른 말씀이 푯대가 되어준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횡설수설 아이가 말하는 걸 알아듣지 못하겠다. 전날에 축구를 보고 자서 그런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중학교 때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동네 형들로부터도 놀림을 당했던 것 같다. 기억이 나지 않아 슬프다고 하면서, 아이는 말을 하다가도 하고 싶었던 말을 잊고 당황스러워한다.
나는 아이의 말과 행동에 덩달아 두려움이 인다. 괜찮니? 하고 묻다 지레 겁이 난다. 혼잣말을 하고 싶을 때,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께 말하기. 혼자 있는 시간에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였다. 독서는 아이가 금세 집중력을 잃어서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래서 붓 펜을 하나 줘 글씨를 쓰게 하였다. 우리는 같이 시편 23편을 적었다. 정성껏 또박또박 여섯 구절의 내용인데도 한참을 공들여 글자를 쓴다. 되뇌어 읽는다. 나는 종종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모르겠을 때 두려움이 인다. 두려움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을 때의 아브라함을 생각한다. 그 막연함이 어떠했을까? 말이 좋아, 말씀 붙들고 떠났다는 것이지 그게 어디 쉽나? 평생을 젖어 살았던 문화와 마을과 사람들과 그 익숙함에 대하여 떠나기란 두려움이 아닐 수 없었겠다. 그래서 우린 또 얼마나 주저하는지. 또는 그나마 연을 끊지 못해 끈을 달고 사는 격이나 함께 데리고 온 ‘조카 롯’이 있다. 두고두고 말썽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점점 더 희망이 없어 보인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창 12:7-9).” 점점 이루어질 확률이 희박해진다. 그러는 동안 아내 사라는 아들을 갖지 못했고 더는 가망이 없어졌다. 그러기까지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는 것일까?
내가 지금 이런 아이와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는 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안에 드는 회의로 인해 나는 점점 ‘남방으로 옮겨간다.’ 애굽이 있는 방향이다. 세상적인 판단과 사고다. 집중하여 책을 읽을 수 없는 아이에게 붓 펜을 주어 글씨로 쓰게 한 건 잘한 일이었다. 고개 숙여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아이는 한 자 한 자 글자를 가져와 되뇐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주는 우리의 목자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 아이는 평안하다. 되레 그런 모습이 아이엄마의 염려이겠으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과정이다. 결코 하나님은 그러는 동안에 가만히 계시는 게 아니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저만큼 또 이만큼 우리가 서로를 보며 위로를 얻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안위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신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안 믿는 이들의 시각으로는 처량하고 한심한 일로 여겨지겠으나, 이처럼 주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의 안위하심을 몸소 체험한 적이 있었던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아이도 나도 글을 다 옮겨 적고 아멘, 하고 화답하였다.
덕분에 짬짬이 설교 원고를 정리해야 하고, 그러느라 보니 일주일 내내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셈이 되었다. 이처럼 묵상 글을 쓰며 찾아보고 적어두는 성경구절이 고스란히 인용구절로 적합하다. 옆에 빈 사무실에 새로 누가 입주하였다. 건설 관련 무슨 아이티 회사라는데 나는 설명을 들었어도 모른다. 다만 저이도 믿는 사람이라. 사당동에 있는 무슨 교회를 다닌다고 하며 인사를 건네니 며칠째 기도제목으로 놓았던 일이 이루어졌다. 행여 안 믿는 사무실이 들어와 서로 불편하면 어쩌나, 하고 주께 바라였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다. 전적인 은혜의 삶이다. 아니면 죄로 억매여 헤어날 수 없는 나날이라. 온통 사는 게 우상인 세월이다. 믿는다는 사람들도 실은 그 믿음이 우상이었다.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라. 이번에 새로 온 중1 아이에게는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었다. 노느라 그렇다는 말에 어떤 사연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아이엄마가 자식들을 그리 폭로하나 이해가 됐다. 할 만큼 한다고 하는데도 하나 같이 왜들 저 모양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기껏 약속의 아들로 주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이가 제정신인가? 한데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창 22:3).”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억지 춘향’이었을까? 마지못한 순종이었을까? 괴팍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의 변덕으로 여겼을까? 어쩌면 그의 늙은 아내 사라를 제물로 바치라 했다면 저는 순종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속으로 얻은 아들에 대하여 그 주도권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면 저는 결코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알고 있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5).” 우리가 돌아오리라. 혼자가 아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가면서 어찌됨인가?
나름 열심을 다해 교회를 다녔고 세 딸을 키웠는데 하나는 ‘노느라’ 고등학교도 가지 않았고 하나는 아예 바닥이라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나아질 게 없어보였다. 그러느라 저는 옷 가게를 차렸고, 그러느라 주일을 지키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며, 그러느라 이제는 하나님이 신물이 난 상태였다. 다음 주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이가 글방으로 오겠다고 하니 그것도 참! 주께서 어찌 하시려는 것일까?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는 무모한 도전이 아니다. 막연한 맹신도 아니다. 맹랑한 자기 과신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합한 삶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이번 주간은 이 말씀으로 씨름하며 사는 셈이 되었다. 내가 죽기까지 내 안에 거친 저항을 어쩌면 좋을까? 오늘 바울 사도의 절규는 그 의미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7:22-23).”
그러느라 아브라함을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참고 또 기다리신 것이다. 정작 우리의 기다림이 아니다. 내 지체 속의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 날 동안, 비로소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로 된다. 내가 죽어야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된다. 말이 쉽지 그러는 동안 아브라함은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을 약속의 씨로 삼으려 했다. 하갈의 몸에서 낳은 이스마엘을 후손으로 삼으려 했다. 이내 우리의 시행착오는 주만 바라게 한다.
비로소 약속으로 얻은 이삭을 하나님이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우리는 자녀의 실패도 주의 허용의 범위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아이가 어찌 이 모양이 되었나 싶겠으나 그로 인해 주의 부르심이다. 모리아 산으로 부르신다.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던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상속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이란 무늬만 그리 덧입히는 게 아니다. 속사람이 바뀌는 일이다. 전혀 새로운 삶인 것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우리로 그런 자가 되어 저 아이 앞에 서게 하신다. 옆 사무실 사람들을 대하게 하신다. 곁에 두시는 이를 말로써 위로하게 하신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4).” 그래서 나의 날마다 기도였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아이가 오늘도 온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알다시피 나는 자신이 없다.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와 함께 한다는 건, 주께서 나에게부터 변화를 꾀하신다. 모든 게 자신이 없으면서도 모든 게 가능하다. 갈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 주가 인도하신다는 것은 주께 맡기는 일이다. 하나님께 대해 산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 6:10).” 이건 예수님이 그러신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이제 무엇에 대하여 살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1).” 말씀 안에 길이 있다. 그리스도인을 산다는 것은 날마다 으서지고 뭉개져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일이다. 이는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마지못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주께서 다음은 어찌 행하시려는지!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주를 경외함이 지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다. 나는 아까울 게 없는 삶이었다. 저가 나를 여기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비애와 탄식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그 안에 감사가 있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7).” 내가 죽어 그리스도가 사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 56: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