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24-25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소망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 소망은 어느 날 저절로 뚝딱, 생겨나는 게 아니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연단은 인내로 통과할 수 있으며 인내는 환난이 없이 괜한 수고가 아니다. 그러므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환난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 중에도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늙은 사모는 어렵게 다시 시작한 조산원을 일 년 만에 접어야 했다. 들어간 초기 비용만 수천만 원이었다. 목사님, 너무 속상해요. 혼자서 물건을 하나씩 정리를 하다 나와 마주치자 저이가 울먹이듯 말하였다. 남편의 목회를 평생 보필하였고 이어 아들과 사위의 신학과 목회를 뒷바라지 해온 것인데, 그 마음이 속상하기도 하겠다. 나름은 그에 따른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여 몇 번은 저이의 자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뭐라 해줄 말이 없어 나는 가만히 서서 힘내시라, 주가 더 크고 귀한 일을 계획하심이다 하고 말해주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지 않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아이는 병원에 들렀다 오느라 열두 시가 다 되어서 왔다. 왜 요즘 글씨 쓰기에 매료되었나 했더니, 읽기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글씨로 쓰게 하는 본이 되게 하시려는가보았다. 같이 성경을 읽고 그 한두 구절을 공책에 옮겨 적었다. 손을 잡고 기도해주었다. 같이 내려가 점심을 먹고 당구를 쳤다.
실은 같이 영화를 보러갈까 했는데, 날씨 탓인지 아침부터 등짝과 허리가 아팠다.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고 앉아 설교 원고를 마무리하는 게 일이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탈고를 끝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같은 층에 있는 목사님이 건너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에서 ‘꿀이 흐르는’에 해당되는 열매라며 가져왔다. 차를 한 잔 나누면서 이야기를 했다. 장황한 저이의 말은 자못 피곤하였다. 어떤 취지에서였든 어느 사업에 등재 이사로 돼 있고, 투자도 하고, 뭐가 어땠는데 결론은 좋지 않았다. 몇 번 들었던 다른 일의 대부분이 좋지 않게 끝났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목사가 목회 외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였다.
그러나 못 알아듣는 것인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인지, 내 말의 취지와는 다르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이어져 말은 더욱 길어졌다. 되새겨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만 바라기를 원하신다. 어려운 성도들의 자립을 돕고 개인사업자들의 운영 전반의 솔루션을 담당하는 어떤 일이라고 설명을 한참 들었는데, 나는 또 저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익을 얻으려고 한 게 아니라지만 어쨌든 손해를 보고, 그 여파가 교회로 옮겨 온 게 아닌가. 성도 간의 관계도 그렇고 본인의 모친과 여동생과의 관계도 그렇고.
우리의 소망은 여기 이 땅의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엄연히 이를 주목하게 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4-25).” 아무리 이런저런 나름의 논리를 편다 해도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어쨌든 어떤 성과를 기대하며 그것으로 이윤을 내서 자신의 판단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 아니었겠나? 우리 안의 열심도 우상이 된다. 주의 이름을 빙자하는 숭배가 될 수 있다.
어찌 육신으로 살면서 육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나? 한데 성경의 강조는 하나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아무리 영으로 돌려 해석하고 판단한다고 하지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결코 우린 그렇게 선하지 못하다. 한동안 사람들은 루소의 성선설을 신봉하여 본래 사람이 선하다는 데서 출발하였다가 번번이 망하였다. 살면 살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은 본래 악하다.
아이들의 영악함에 놀란다. 자신이 다니기 싫은 걸 다른 애들이 다 다니기 싫어하는 것으로 제 엄마에게 말한다. 저이는 아이 말만 듣고 다른 애들을 운운하며 그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받는 게 아닌가,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꼬치꼬치 따졌다. 마치 자신의 아이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식이다. 도대체 열심을 다해 교회를 다닌다는 저이의 신앙이 궁금하다. 내가 보기에도 저 아이가 맹랑하다. 반듯한 옷차림과 달리 말투나 행동이 거칠다. 나는 다룰 수 없어 두 손을 들었다. 다른 아이 집안 사정을 운운하며 자기 애를 두둔하는 아이엄마의 됨됨이가 알만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겐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고는 도대체가 건짐을 받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결코 주의 은총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게 사람의 타락이다. 그러므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주가 우리를 이끄셔야 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끝까지 책임지셔야 한다.
말씀 앞에 앉을 때 비로소 이해가 된다. 내가 어째서 그러했는지, 저이가 무엇으로 왜 힘들어하는지. 나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요구하셨던 하나님의 의중을 이해하였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게 우상인지 아닌지, 저는 알지도 못하고 귀히 여겼을 것이다. 본디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 그것까지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항변을 하듯 내게 자꾸 변명을 하려하는 젊은 우리 층 목사님에게 나는 마침 설교 원고로 작성하였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그 무엇도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외에 하나님의 무엇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거룩을 도모하고자 하는 어떤 소품도 조심스럽다. 경건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의미를 둘 때 변질된다. 어려운 성도들의 살림을 목사가 나서서 도모해야 할 사업은 아니다. 후에 노후대비를 목사가 나서서 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의 결과인 이삭까지도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쳐보면 안다. 그게 얼마나 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말의 대부분이 그것을 두둔하는 데서 눈치 챌 수 있다. 관심이 기운 곳으로 말이 흘러나오게 돼 있다. 한 시간 반 남짓 이런저런 말을 하는 데 있어 거의 전부가 그 사업장에 얽힌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 속을 알만하였다. 속상해요, 목사님. 하고 울먹이는 늙은 사모의 사업장을 보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러니 어쩐다? 이제 우리는 그것까지도 기도제목에 올려 주께 아뢴다.
같이 저녁에 모여 기도회를 하면서 이런저런 말이 늘었다. 그 대화가 대부분 누구의 사정을 두고 주의 이름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이었으니, 아 이게 또 이렇게도 달라지는구나! 우리가 언제 ‘저런 아이’에 대해 관심이나 가졌었나? 저이의 형편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었겠나? 그 상한 심령을 두고 우리가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줄이야! 나는 언제 읽었던 ‘치유대화’가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하였다. 누구의 말을 들으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저처럼 길게 이어가는 것일까요? 주께 묻는다.
아이의 장황한 설명과 이어지지 않는 말을 들으며 주께 기도한다. 아이 손을 잡고 성령의 도우심을 바란다. 그러라고 이 일을 두셨다. 목사는 목회 외에 다른 일에 관여하는 게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나는 젊은 목사에게 말해주었다. 늘 바쁘고 부산한 이였다. 나름의 기치와 목표가 분명하였다. 변명이 길고 항변이 옳았다. 뭐라 한들 들을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리 운을 떼고 저이의 했던 말을 또 듣고 있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의 단면적인 태도와 별 거 아닌 시간이지만 퇴근하고 곤죽이 되어 온 딸애와 헐레벌떡 수업을 마치고 뛰어내려온 아내와 같이 앉아 짧은 시간이나마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한다. 어쩌면 별 것도 아닌 그 일을 통해 우리는 더욱 주의 뜻을 알기 원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고한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 주께 아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주가 인도하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주가 책임지실 것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 안에 두시는 기쁨도 주의 것이다.
어떤 것도 주 외에 우상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2-13).” 학생이 시험이 없다면 성적을 어찌 알겠나? 우리 삶에 고난이 없다면 어찌 인내를 배우겠나?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연마하지 않은 숙련공은 없다. 순금은 연단에서 나온다. 귀히 여기시는 증거다.
믿음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그러한 힘도 더하실 것을 믿는다. 이는 마땅한 논리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리하여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