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5-16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시편 58:1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묵상한다. 이를 놓치면 오해가 생긴다. 가령 이삭은 아브라함의 경계를 잊었는지, 둘째 아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들었으면서도 첫째 아들 에서를 편애하였다. 장자에 대한 문화적 이해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선되었다. 그로 인해 저 둘은 여전히 앙숙이다. 또한 야곱의 편애는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빚어지는 7년씩 두 번 긴 세월의 흐름으로 압축된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를 경계하시며 약속의 씨 이삭마저도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를 알았고 그에 대해 순종하였다. 저는 단지 이삭을 죽이는 시늉만 냈던 게 아니라 실제 그를 제단에 결박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다급하게 저를 부르신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창 22:11).” 그리고 인정하신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
이삭을 대신하여 준비하신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13).”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제물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경계하셨던 것은 편애다.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이다. 그 사랑이 당장 다음 세대에도 이해되지 못하여 이삭은 장자인 에서에게 축복을 더하려고 하였다.
오늘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우리 됨을 알게 하신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우리의 수고와 애씀으로 주의 긍휼하심이 더해지는 게 아니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인 긍휼하심이었다.
이처럼 가만히 말씀과 말씀 사이를 묵상하다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한 다윗의 시에 감복하게 된다.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은 의롭다고 고백하는 욥의 고백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지만 도와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하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말처럼,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시 58:1).” 우리에게 두시는 것을 올바르게 판결해야 한다.
시간을 두시는 이가 나에게 허락하신 시간에 대하여, 오늘까지 나의 생명을 여기에 두시는 이가 그 맡기신 생명에 대하여, 모든 관계와 관계 속에서 나는 어찌 정의를 말하고 있나? 그럼에도 온갖 우상이 난무하여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수시로 내 안에 들곤 하는지. 그것을 매순간 돌이켜 주 앞에 내어놓는 것이 경건이었다. 아이가 시험 기간이라 토요일이 헐거웠다. 아내는 보충을 해주어서 오후까지 혼자 있었다.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처럼 나의 사고는, 그 묵상의 정도가 하나님이 두시는 독서의 범주에서 이루어진다. 매번 경험하는 일이지만 나에겐 그야말로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책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는다. 어떤 회의와 갈등도 그 주제에 어쩜 그렇게 잘 맞추시는지, 앞선 믿음의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주어진 난제의 의미를 알겠다. 하나님의 능동적인 선택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7-18).”
오늘 말씀에서도 알겠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그러므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 주께 맡기는 삶이야말로 가장 손쉽고 올바른 선택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하나님의 일이 더딘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시는 그의 긍휼하심으로 우린 회개에 이른다. 돌아서면 또 회개다. 성화란 이처럼 무모하고 무기력한 것 같은데,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다만 이를 확신하고 아는 데까지 우린 얼마나 숱한 ‘아이돌(idols)’에 심취해 있나? 우상이 난무하다. 가장 두려운 게 사랑이다. 사랑을 빙자하는 우상은 우리 눈을 멀게 하였다.
당시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물었던 7년의 노동은 아무리 그래도 신부를 데려오기 위한 여느 지참금에 비해 4배가 넘는다고 한다. 이를 두 번씩이나 하여 14년의 세월이었으니, 과연 하나님이 더디신 건지, 우리를 향한 오래 참으심의 긍휼하심인지 바로 알겠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 크고 위대하신 사랑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나는 종종 지나온 나의 시간을 돌아보면 알겠다. 오후께 노인이 건너와 차를 한 잔 하면서, 무슨 말 끝에 술 먹고 놀던 이야기로 풀렸는데,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주의 인자하심은 나를 참고 또 오래 기다려주신 것이었으니 설령 그 참에 죽이셨다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위인이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하나님이 나를 어찌 사용하시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다. 그렇지!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다.
말씀 앞에 앉아 누구를 생각하고 또 어떤 이의 어떤 사연을 가져다놓고 있어도 이해가 된다. 그것은 오늘 내게 두시는 말씀으로 읽힌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누구의 사연과 그 어려운 형편을 보면서 나는 성경을 읽는 것 같다. 나의 이런저런 삶의 모습과 지난날의 일들을 통해서도 말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이것이 긍휼하심이었다. 아무리 돌아봐도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답이 없다. 해결이 될 게 없다. 그저 살아서 사는 날을 다 허비하여야 조금은 알 수 있을까? 노인의 늘어진 이야기에서도 나는 문득 주의 은혜를 바라였다. 주가 아니시면 저이를 누가 꺾을까? 저 나름의 완고함을 누가 붙들어 세울까? 그 곁에 그처럼 믿음으로 손짓하는 이가 많았는데도 자기 생각에 빠져서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게 또한 나였다. 주의 강권하심이 없다면 저는 어쩌면 주와 상관없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환난과 어떤 어려움이 그래서 복이었구나. 오늘에 두시는 고통과 염려가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게 하는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돈이 좀 넉넉하였다면 이처럼 주님으로만 절실할 수 있었을까? 몸이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린다면 이와 같이 다른 영혼을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기나 할 수 있었을까? 오늘 두시는 어려움이 곧 나를 주 앞에 온전하게 세운다. 새삼 그 논리를 알 것 같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2-13).” 때론 말씀보다 부당한 게 없는 것 같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 오늘 이를 바로 알게 하신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우리의 달음질이나 노력에 의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다만 주를 바람이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 이제 이를 알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나는 할 수 없고 주만 하실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 곧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