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편 61:2-3
너무 쉬운 일이어서 가장 어려운 게 구원의 은혜다. 받는 자리에서는 거저인데, 주는 자리에서는 그 값이 대단하다. 열왕기하 5장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읽었다. 지금의 시리아인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다. 저에겐 권세와 능력이 있다. 한데 나병환자라.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1).”
이 이야기 가운데 아무런 조명도 받지 않는 한 인물이 스치듯 등장한다. 이스라엘에서 데려온 소녀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2-3).”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저를 두셨다. 저 아이는 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여기까지 사로잡혀 왔다. 그리고 우연처럼 나아만 아내의 몸종이 된 것 같으나,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이 말을 증거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나아만은 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사가 있는 이스라엘로 갔다. 그 권세와 위용을 내세워 마땅한 대우를 기대하고 바라며 간다. 이스라엘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무슨 시험인가 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7).” 같은 일을 두고 참 여러 반응이다. 엘리사가 듣고 자신에게 보내라고 한다(8).
그리고 저에게 처방을 내린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10).” 내다보지도 않고, 그의 위용에 걸맞게 자신을 대우하지 않는 것에 나아만의 노여움이 크다. 여기서 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종들이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13).” 나아만에게 그 일은 너무 쉬워서 가장 어려웠다.
어쩌면 그래서 우린 과장하고 재해석하고 뭔가 의미를 부여하여 여러 의식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그럴듯하게, 그에 걸맞은 것을 찾는 일이다. 거저 받는 데 익숙하지가 않아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자기만족을 위해서이겠다. 더위로 한참 헉헉거리고 있을 때 이 말씀을 묵상할 수 있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청량감이 느껴졌다. 메모를 하고 칠판에도 적어두었다. 저 소녀는 나를 위해 속량의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를 연상케 했다. 나아가 오늘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사명의 정도를 가늠하게 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 우리의 존재 이유였다. 공허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듯하나 그러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아람으로 끌려온 소녀를 떠올리게 된다. 주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요한을 생각하게 한다. 대체 우리가 이 사람을 두고 기도하고, 이런 말을 해준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회의와 갈등을 단숨에 잠재울 수 있었다.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하였다. 저가 가르치는 아이가 고1인데 틱 장애가 있는가 하면 폭식증이라. 점점 거구가 된다. 뭐라 이르고 권해도 소용이 없다. 몇 주 전부터는 아이를 가르치고 나면 배가 너무 아파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워했다.
듣다보니 그 집안이 남녀호랑개교다. 전에 5학년일 때 아이는 그저 틱이 있는 순한 아이 정도로만 알았었다. 학원으로 오던 아이가 이사를 가게 되었고,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 결국은 사양하지 못하고 아이 집으로 수업을 가게 된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가는데, 갈 때마다 배가 너무 아프다. 심하면 다음 날까지도 이어진다고 했다. 부모는 모두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 많이 배웠고 적당히 부유하였으며 예의 바르고 언제나 보면 공손하다. 나는 친구에게 ‘영적 전쟁’이란 표현을 썼다.
기도해보고 아이를 맡기신 확신이 들면 더욱 주의 도우심을 바랄 것이지만 괜한 자신의 공명심과 어떤 측은지심에 의해 저지른 일이면 그만두는 것도 옳았다. 집안에 모신 신전 앞에서 아이를 지도하고 가르치기란 쉽지 않을 거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간 큰 코 다칠 일이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다시 읽는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얼떨결에 모르고 한 일이면 되짚어봐야 하고 그럼에도 주가 맡기신 일이면 아이를 놓고 주께 더욱 기도하여야 한다. 능력주시기를 구하여야 한다.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을 바라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벌써 넘어진 것이나 같다. 오늘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주는 가난하여지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시리아 땅에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권세 있는 나아만을 나병환자로 만드셨고, 앞서 한 소녀를 그 땅의 몸종으로 팔려가게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를 생의 최전방에 배치하신 것이다. 어쩜 이렇게 거짓말처럼 아이들이 다들 병들었을까? 하고 놀라지만 전에부터 그러했을 것이다. 늘 그런 아이들은 곁에 있었다.
다만 그동안 우린 그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저들 가정이 어떠하든지, 아이의 심령이 어떠한지, 그 영혼이 얼마나 괴로운지, 우리는 한사코 다른 데 눈을 돌리고 살았으니까. 귀를 막고 지냈으니까. 새삼스러운 것은 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다. 거짓말처럼 아이들이 모두 아프다. 힘에 겹다. 이게 다 꾸며낸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같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언니도 ‘그런 아이’를 맡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렇잖아도 같이 한 번 갈까 하고 내게 전화를 하려 했단다.
저이가 내가 아는 대로라면 교회를 나갔다 안 나갔다 하고 자신은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그런 위인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이였다. 여러 번 이야기는 들었고 한 번은 저쪽 글방에 있을 때 왔다간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그런 아이’ 또는 ‘그런 일’을 접하게 하시는 게 벌써 선명하게 보인다. 당사자들만 ‘에이 설마’ 하는 일이다. 친구도 영적 전쟁을 운운하며 보다 먼저 주의 능력을 바라고 구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은 귓등으로 듣는 것 같았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그 대책을 보여주신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1:2-3).” 땅 끝에서다. 막다른 골목처럼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그냥 안 한다 그러자니 도리가 아닌 것 같고, 한 푼이 아쉽기도 하고. 그냥 하자니 겁도 나고 몸에 이상도 느껴지면서 께름칙하고. 그렇듯 우리 마음이 약해질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께 부르짖는 것이다. 경험이 많은 누구의 말에 의존하고, 그와 같은 일을 마치 자신의 수훈으로 삼으려고 해서는 어림없다.
나보다 높은 바위로 인도하소서. 흔들림이 없는, 견고하고 안전한 지점이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견고한 망대라. 모든 게 이제 한 눈에 보인다. 여기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 기어이 우리는 땅 끝에 서야만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몇 주 전부터 그 아이 집에만 갔다 오면 배가 너무 아프다니. 그게 어찌 그냥 그러려니 할 문제인가? 또한 믿는다는 사람이 주께 부르짖지 않고 어떤 도움을 바라는 것인지. 오늘 바울은 이를 분명히 선을 긋는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결코 이 세대를 따라서는 안 된다. 다들 종교의 자유를 운운하고 혼용된 술을 마시듯 종교적 화합을 강조한다. 다 그렇지 뭐, 하는 식으로 허용하는 게 늘어간다. 그 색이 그 색 같다. 노인은 더 늙은 손아래 동서 흉을 보다 여전히 술 담배를 한다며, 목사가 그러면 쓰겠나? 하고 말을 흐렸다. 안 믿는 사람들도 건강을 위해서도 담배를 끊는 판국에. 저이가 저쪽 어디 감리교 쪽이라니! 나는 뭐라 덧붙일 말이 없어 혼자 생각하였다. 내가 뭐라 할 게 아닌 다음에는 할 말이 없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늘 나의 기준을 잡는데 용이하다. 신대원을 다니면서 한 번도 설교 실습을 못하고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지 못했던 사람이 그런데도 혹시 몰라 늘 품고 다녔던 설교 원고의 본문이기도 하였다. 한참 그럴 때지만 신학생들의 특징은 너무 많은 일에 나댄다. 성경에 문자적인 오류가 있네, 어떤 성경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네, 무슨 교단의 어떤 교리가 성경적이네 아니네, 누가 땔감을 어느 산에서 구했는지, 누구 안식구가 어느 쪽을 보고 돌아누워 자는지. 별의별 것에 다 토를 달고 갑론을박을 해대는 것이다.
그럴 때 내가 품에 가지고 있던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그에 따른 몇 가지 방법도 제시한다. 첫째, 즐거움으로 할 것이다.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8).” 둘째, 사랑으로 할 것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 셋째, 열심으로 할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0-11).” 넷째, 이 모두를 성도를 위해 할 것이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
그러느라 저주하지 마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함께 울어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 겸손해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6).” 선을 도모해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 모든 사람과 화목해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
새삼 오늘에도 이 본문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절실하기만 하다. 결론은 주께 맡기라. 말씀이 길이다. 다만 나는 열심으로 잘할 것이다(19-20). 이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신대원 시절 그 빙충맞던 때도 이와 같은 말씀은 나를 붙드시더니, 여전하여서 오늘의 내게 또한 큰 힘을 더하신다. 누구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하며 어떤 길을 제시할 때에 말씀이 이정표라. 달리 더 좋은 수를 내어놓을 게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시 61:1).” 그래서 기도한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