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로마서 15:1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편 64:9-10
초등학교 고학년들 사이에서 자해가 유행처럼 번져 학교가 소동이 났다. 아이들 개별 상담이 이루어지고 학부모 몇이 학교에 불려갔다. 실은 또 그와 같은 도구가 버젓이 팔려 무슨 판을 팔뚝에 놓고 예리한 도구로 긁어 생채기를 내면 하트나 십자가 모양을 내기도 하였다. 5학년에서도 몇몇이 특별관리 대상이 되었는데, 그 중 두 명이 예배에 나오던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는 아예 별도 관리를 하고 상담과 치료를 병행할 정도로 심각한데, 아빠는 없고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짜에 만난다는 ‘그 아이’였다.
세상이 악하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시 64:5-6).” 한때 어린것들의 장난으로 보아 넘기기엔 너무 구체적이며 악랄하다. 그냥 애들끼리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없는 게 ‘우리 아이’ 서넛이 그것에 가담을 했기 때문이다. 미장원 딸아이는 잦은 부모의 부부싸움으로 스트레스를 견디기 어려워서였고, 운동선수 동생아이는 두 오빠의 특기생 활동에 몰입하느라 엄마는 딸애에게 신경도 쓰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성격이 괴팍하고 불같다.
서로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를 격려한다. 떼어놓고 싶어 해도 서로 또 죽고 못 사는 사이라. 각자 남몰래 놓은 올무를 즐긴다. 애들이 뭘 알겠나싶지만 나야말로 조심스러워서 두 손을 들었다. 어깨를 툭, 쳤는데 저들끼리 성추행이라며 낄낄거렸다. 지나는 길에 만나 악수를 하려다 어색해하여 손등을 툭, 건드렸는데 내가 저의 배를 만졌다고 하였다. 뭐라 하니 부모 욕을 했다고 하고, 일러 야단을 치니 아픈 사람이라 신경질적이라고 했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두 손 들었다. 글방에 오는 것을 그만두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3-4).”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이지 않나? 나는 속상하고 어려워 뭘 어찌 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아내가 그 아이 둘과 밖에서 따로 만나 상황을 알아보고 그러지 말라고 이르고 주일에 교회에 오라고 했다는데, 나의 소극적인 자세는 어떻게 감당이 안 돼 쩔쩔맨다. 학교 앞에서 어느 학원은 장사치와 다를 바 없이 드론을 선물로 주거나 무슨 게임 아이템을 덤으로 주며 아이들을 꼬였다.
애들이 다 어른 흉내다. 팔뚝에 칼질을 하면 상처가 아물고 흉터는 문신처럼 남는다. 우쭐하여 아이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고 이를 동정하느라 어른들은 식겁한다. 그럼 당사자인 아이는 이것으로 상대를 조종하려 든다. 뭐라 일러 나무라면 졸지에 대적이 되어 순식간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찌 됐든 당사자로 지목된 아이들 가운데 세 명 모두 내가 아는 아이들이라 마음이 어려웠다. 아내도 그 역할이 조심스러워 다그쳐 야단을 칠 수도, 그렇다고 동조하여 위로로만 다가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엄마들은 제 아이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어서 ‘어떤 아이’를 지목하여 서로는 그 애 탓으로 돌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7).” 말씀 앞에 앉아 가만히 숨을 고른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우리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일련의 사태를 두신 게 아닐 거였다. 하필 그 대상이 함께 예배에 나오곤 하던 두 아이가 모두 포함이 됐다. 두어 번 같이 와서 안면이 있던 아이가 가장 우려의 대상이 됐다고 하니 심각하다. 하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모르는 세태에 벌어지는 일이다.
문신이 유행처럼 번지고 성적 유희가 공공연하게 문화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으며, 이를 아이들이 모를 거라 여기지만 버젓이 학원들 아래 위층에 그런 가게들이 즐비하다. 내어놓은 배너 광고판이 낯 뜨거울 정도로 농염하다.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그 앞에서 성적인 상상을 일삼는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4).”
주님의 강력한 손길이 아니고는 어림없다. 하늘을 우러러보게 하셔야 한다. 오후께 한 아이가 거의 일 년 만에 전화를 주었다. 스물넷. 여대 3학년. 내가 언제 하도 아이가 정신없이 굴어 미친년처럼 산다고 뭐라 했었던가보다. 이제 미친년처럼 살지 않아요. 하며 아이의 첫 마디가 안부 치고는 직설적이었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다 주말이라 집에 내려가는 길에 모처럼 전화를 건 거였다. 고1 때 아이는 사귀는 남자아이랑 성관계를 가졌다. 그땐 그 애가 돌파구였다. 비상구 같은 상대였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현실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니 그 뒤로 아이는 성적인 데 온통 관심이 쏠렸고, 사귀는 남자와는 그렇듯 쾌락을 일삼았다. 한참 아이엄마가 자주 전화를 주어 아이들 문제로 상담하곤 하던 때라 그 집안 내력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아이 조모가 여호와증인이라. 아이 부친은 지긋지긋한 종교 행위에 환멸을 느끼며 성장했다. 늘 그 일로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이 다니는 글방 선생이 목사가 되었다는 소리에 먼저는 딸애를 끊었고 다음은 아들애를 끊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저이 큰집의 두 사내아이들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게. 그럴 때가 있었다. 모처럼 아이와 통화를 하다 그때 기억으로 서로들 잘 지내시는가,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더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제 미친년은 아니에요.’ 하며 농담처럼 말을 꺼낸 것이다. 고등학교 때도 그러했으니 여대에 들어가면서 더 가관이라. 지하철에서 보고 한 눈에 반해 번호를 교환하고 다음 날 만나 성관계로 시작하였다고 했었으니, 정말 그런 일이 바로 내 면전에서 벌어지는 세상이었다. 일 년 남짓 지금 사귀고 있는 아이 하나로 만족하며(?) 더는 양다리도 안 하고 또 그렇게 그걸(?) 좋아하지도 않는다며 거침없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 앞에서 오히려 나는 계면쩍었다. 안 됐고 그저 마음이 쓸려 아린데 어떻게 더는 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아이엄마에게 말해줘야 할까? 아내는 두 아이를 개별적으로 만나고 와서 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엄마가 알까봐 쉬쉬하는 걸 다시는 안 그러기로 약속하고 당부하며 알리지 않기로 했다는데, 알린들 또 뭐라 말해줘야 할까? 당신이 두 아들에게 정신 팔려 있는 동안 예쁘고 발랄한 딸애의 심령이 병들어서 자해를 하고 공갈을 치고 다닌다고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우리는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주께 고하였다. 다시 글방으로 오게 하자니 그 대여섯 명의 무리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되고, 누구누구만 오게 하자니 것도 이상하고. 또 그래서 온다고 한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
그래도 미친년이라고 욕을 해대며 야단을 쳤던 것이 아이에게는 고마움으로 기억되고 있었는지 다짜고짜 첫 인사가 ‘이제는 미친년처럼 살지 않아요.’ 하는 것이었으니! 정말 일부러 그러시는 것처럼 '정말 이상한 아이들'투성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주께 돌이켜 신학을 하면서 부쩍 달라진 일이다. 전에는 십여 년 넘게 그 일을 하면서도 그런 애가 없었던 것 같은데, 느닷없이 생긴 거에 신경 쓰던 중3 아이가 고딩이 되면서 거식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고 끝내 먹는 걸 거부하던 아이에서부터, 그러고 보니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주께 돌이키고 난 뒤 모두가 병들어 있던 것이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주가 이루시는 일이라 해도 참 이상할밖에. 상처 입은 어린영혼이 그렇게 많은 것이었으니, 한 녀석은 제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살해 모의'를 꾸며 사람을 놀래고. 잘 자라주었다 싶던 모범생 아이는 기껏 좋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귄 남자아이와 동거를 시작하였고. 한 녀석은 학업을 작파하고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일삼다 심한 우울과 공황에 시달려야 했으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5-8).” 주의 마음이 들어오자 온통 내 곁에 병든 아이들뿐이었다. 어떻게 그동안 감쪽같이 몰랐을까? 목사라 종교인을 운운하며 글방부터 서둘러 끊게 한 그 부모는 그야말로 난다 긴다 하는 학력과 재력과 사업을 일구고 있었으나!
이 모든 게 다 허사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저들로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리실 것이다.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실 것이다. 기껏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 녀석이 한 해를 견디지 못하고 자퇴를 했으니, 참나.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또 오전에는 아이가 와서 함께 요한복음을 읽고, 그 가운데 몇몇 구절을 글씨로 옮겨 썼다. 돌아가 혼자 있는 시간에 쓴 글씨를 보내오며, ‘기도하며 쓰게 된다.’는 말을 하여 나는 감격하였다. 왜 주님은 의원으로 오셨다고 하셨는지, 모두가 환자인데 아프다고 하질 않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그래서 애통하는 자들 곁에 주님이 계신 거였다. 세리와 창기와 버려진 사람들, 고통을 호소하고 죄를 자복하며 도움을 구하는 자들 곁에서 말이다.
기어이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인데, 인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지금 내 곁에 두시는 일련의 상황과 아이들을 대하면서 말씀을 붙든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애태우며 우린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줄 모르는 아이들과 그 가정을 대신하여 바랄 뿐이다. 일일이 아이들 사연을 노트에 적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달리 어떻게 할 방도를 모르겠다. 아이를 잡아다가 미친년이라고 야단치며 훈계를 한들. 그 아이엄마에게 알려 그 잘난 삶의 실태를 낱낱이 고자질하듯 말해준들. 그런 가운데 아이들더러 교회에 나오라 하고 예배에 오라 한들. 도무지 들어먹지 않는 이 땅에서 하나님은 내가 무얼 하길 원하시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9-10).” 다만 그러할 것을 확신한다. 다들 악에 받쳐 제 몸에 흠집을 내고 칼로 긋고 색을 덧입혀 멋에 겨워하고 그것을 자랑삼아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6).” 이 황당한 말씀을 고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내가 마다할 게 아니다. 그런 소식이면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주를 바라고, 실제 그런 아이를 곁에 두심으로 고달픔을 안고 허덕이면서도 주께 간구하는 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원하고 바라고 구하는 일을 쉬지 않는 게 오늘 내게 두시는 사역이었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시 64:1).” 그러니 내가 주께 바라는 기도였다.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3-4).” 아뢰어 주께 고함으로,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7).” 저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시기를.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8).” 아, 비로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
곧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