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18. 7. 14. 07:14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시편 71:14

 

 

 

글방이 교회여서 싫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더욱이 목사라고 하니 부담스러워한다나. 아이엄마도 한때는 교인이었다. 언제 어디서 신앙을 잃어버린 것일까? 빠른 효과를 바랐다. 아이를 당장 바꿀 수 있는 어떤, 처방을 찾았다. 그런 아이의 상태를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오래 방임하거나 지나치게 밀착하여 발생한 일인 것을 정작 자신들만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대놓고 그런 엄마를 무시하였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문자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혼날 거라면서 아이는 태연하였다.

 

틈틈이 글씨를 썼다. 말씀을 필사하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그때마다 글씨는 그 자체로 의미를 품었다. 모처럼 휴식 같은 하루였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주일이어서 주보만 만들어놓고 여유로웠다. 청년부에서 어느 교회로 2박3일 여름성경학교를 간 아이에 대해 노심초사 마음이 쓰였다. 약은 잘 챙겨 먹었는지, 너무 피로하지는 않은지. 간간히 아이가 문자를 주어 고마웠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이 쓰인다는 것. 그 마음이 주의 것이라는 데 이제는 이견이 없다. 이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데도 오히려 만족함이 더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6).” 여러 번 옮겨 적으며 그 의미가 새로웠다. 저들로 ‘그의 아들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그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일이다. 가끔은 내가 어느 아이를 놓고 자꾸 신경이 쓰이다가도, 또 온통 내 마음이 안타까움으로 아이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알았다. 이처럼 주께 구할 수 있는 게, 하나님의 기쁨이시겠구나!

 

‘살리셨고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으신 것 같으나, 순전히 그 죽음은 내 것으로 인함이었다. 주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처럼 주의 권능으로 나를 다시 살리셨다.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저들 곁에 두시는 것은 결국 또 저들도 살리시기 위함이다. 글방이 교회여서 싫다는 말에 나는 낙심하다가 그만큼 골 깊은 저이의 불신앙의 자리를 가늠해보았다. 믿었었다는 저의 과거형 믿음을 다시 살리시기를 주께 구하였다. 그리 여겨 애쓰는데 휙, 날아가 버리듯 그만두면 우리로선 할 게 없다.

 

두시는 날 동안 주의 이름을 부르자. 나는 아내와 딸애에게 그리 부탁하였다. 딸애도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총무과 과장이 실은 늙은 사장의 딸이었다. 병적으로 말이 없고 기가 죽어 항시 주눅이 든 사람처럼 시무룩한데, 언젠가는 직원들 앞에서 사장이 그 과장을 면박하여 손찌검을 했다는 말도 들었다. 부사장이 오빠이면서 또한 저의 아들인데 그 또한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라 생뚱맞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딸애는 언제부턴가 저들을 기도제목으로 내놓았다. 그래도 이제 같이 말도 섞고 점심도 먹으러 다니고 종종 웃기도 한다면서, 그렇듯 우리는 우리 안에 주의 마음으로 누구에게 곁을 내주는 사람들이었다.

 

곧 우리에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12).” 이 자유는 덕을 위한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 저들을 위한 거였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로 인하여 가진 우리의 자유다. 종종 우리의 자유는 위협받는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저들은 형식을 바라고 어떤 권위를 우선한다. 스스로 자부하고 남을 업신여긴다.

 

우리가 무얼 먹고 안 먹고, 어떤 일을 하고 안 하고는 순전히 내 안의 자유하심 때문이다. 가령 남의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꼬여드는 초파리와 냄새를 제거하는 일도 그곳까지도 교회이기 때문이다. 청소기를 돌리면서, 물걸레질을 하면서 나를 두시는 이 모든 데가 주의 성전이라는 생각에서 누가 보든 안 보든, 우리의 자유는 주 앞에서 활동하는 영역이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4:31).” 약속의 씨를 품고 사는 일이었다.

 

은혜와 동시에 무엇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생각이 지옥이다. 구원에는 은혜이면 충분하다. 은혜에는 나의 빈손뿐이다. 나의 결핍이 주의 은총을 바란다. 곧 내 안에 드는 어떤 어려움, 아이나 그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 또는 어떤 염려로 인하여 주를 바라고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복되었다. 종일 아이가 신경 쓰여 내 자식도 아닌데 오히려 더하는 마음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게 다 주의 마음이라. 나는 이제 그리 판단한다. 곧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그렇게 하시는 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 이상한 아이들만 곁에 두시는 것처럼 그리 마음이 쓰이는 것 또한 이상하다 싶은 것이니, 종종 그것이 내 마음이 아니었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5).” 다른 기대가 가당키나 할까?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6).” 나의 일생을 주가 빚어 오셔서 오늘에 두셨다. 심지어는 나의 실수와 죄악 된 시간들까지도 돌이켜보면 지금으로서는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할 수 있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하물며 죽어 마땅한 나를 오늘에 두신 이가 이 모든 남은 여정을 이끄시지 않겠나?

 

때로는 여러 생각이 뒤엉켜 근심하게 하고 두려움으로 떨게 하지만,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오늘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나를 통치하던 권세들이 있었으니, 사람을 찾고 저들의 위로를 구하였던 때라. 인정받고 싶어 하며 사랑을 희구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떤 보장을 탐하고 그렇듯 괜찮은 일과 사람을 곁에 두려 애쓰던 때이다. 주가 저것들을 내 안에서 무력화시키셨다.

 

더는 친구의 위로를 우선하지 않는다. 동조하는 무리들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 따르던 즐거움도 무색하게 되었다. 그저 구경거리로 삼으셨다. 이는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십자가가 내 안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16).” 더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다. 내가 아이를 생각함은 주가 내 안에 두시는 마음 때문이지, 목사니까 그 일이 내 일이어서 하는 당위적인 마음 때문이 아니다.

 

다만 나로 말미암아 주께 영광이 올려지기를. 주가 아신다. 주가 하시는 일이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17).” 나는 주의 것이라.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시 119:94).” 그와 같은 고백이 낯설지 않다. 더는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다.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정도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겠나! 아무도 모른다 해도, 그저 공허한 ‘광야의 소리’로 불려지다마는 것이라 해도,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고전 10:26).”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면서 유익한 것은 하루에 몇 번 더 읽으면서 되새길 수 있다는 것과 하루하루 그 날에 두시는 일들을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또 하나 요즘 새로운 충만함은 여러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덧붙인 것을 글씨로 쓰면서 그 의미가 전혀 새롭게 더해진다는 일이다. 이내 말씀을 필사하는 축복을 알겠다. 새로운 문 같다. 전혀 다른 세계다. 한 글자 한 글자 자음과 모음이 만나 그 의미를 되뇌게 한다. 나의 팔은 적당한 힘을 안배하며 하얀 종이 위에 주의 말씀을 앉힌다. 배어난 글씨는 그 뜻을 더한다.

 

‘사나 죽으나 죽의 것이라.’ 가령 이 내용을 글씨로 옮겼다면, 눈으로만 보던 세계가 내가 젖어드는 나라이다. 어떤 바람이 또 소망이 내 안에 새겨지는 일이다. 그렇지! 이를 오늘 말씀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는 일이다. 아,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7).” 내가 오늘을 사나 오늘이 하나님의 나라였다. 장래의 그 나라가 지금에도 실현되는 일이다.

 

내가 아이를 생각함은 내 안에 예수의 마음이라. 아이가 새벽에 답을 주어, 성경학교에 잘 임하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을 때 내 안의 안도함이라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5).” 그렇지 그렇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19).” 이와 같은 말씀으로 안도할 수 있다니! 그러므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나는 거저 받은 것이나 주는 그 값을 지불하시느라 죽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4).” 결코 어제 오늘 어쩌다 생겨난 게 아니었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5).” 그리하여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