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고린도전서 7:20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72:6-7
밤 아홉 시가 다 돼 선생이 왔다. 성긴 머리며 큰 키에 어정쩡한 몸짓은 여전하였다. 한 시간 남짓 말에 쫓기듯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이고 있는 사람처럼 그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자신의 주장을 일삼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고1 때 만났으니, 한참 시절 그와 같이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로 하여금 주를 멀리하게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였다. 여전하여서 왜 그러고 있냐는 식의 논쟁이었다. 마침 동창 중에 한 이가 주의 소명을 안고 신대원에 간 것이다. 그러는 저는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가보다.
할 말을 주시고 들을 말에 귀를 열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설득하여 이룰 수 없는 것이었으니 나는 다만 듣고 ‘예, 아니오.’만 하면 되었다. 인천에 계신 늙으신 어머니를 가급적이면 이제 토요일마다 뵈러 와서 자고 간다고 하였다. 처와 두 아이는 뉴욕에 나가 산 지 오래였다. 이루어가고 있는 문화 사업이라는 게 그렇게 떼돈을 버는 일은 아니었으니, 저가 늘 앞서 말이 앞서는 까닭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미안함은 종종 자기 완고함의 덫에 걸린다. 뭐라 한들, 들려지지 않을 말에 대하여는 주께 아뢰었다.
저마다 다들 자기 생각에 겨워 산다. 선생을 뵈면 늘 그의 정당함이 기도 제목처럼 걸린다. 중3 아이가 오전에 제 시간에 왔다. 이렇게 말하는 건, 안 올 줄 알았다. ‘양치기 소년’ 같아서 아이는 도와주세요, 하는 말을 ‘늑대가 나타났어요.’ 하듯 한다. 전에 같으면 두어 번 속아 넘어갔다가 등을 돌렸을 텐데,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아이가 그럴 때면 눈길을 주고 마주해야 하는 게 내 일이라 여겨졌다. 미미하지만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게 있어서 말이다. 시간을 지키려고 하는 일에서부터 흘려듣는 것 같아도 해주었던 말을 실천하려고 하는 게 느껴진다.
한다고 나름은 하는데, 걸음이 느린 아이처럼 답답하고 성가실 뿐이다. 그러니 내 일은 기다리시는 수밖에. 함께 보조를 맞춰 천천히 가도 될 일이지 않겠나. 선생에 대한 생각도 그리 정리되었다.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일까? 토요일마다 늙으신 어머니 댁에 와서 자야겠다고, 그래서 다음에는 더 일찍 들러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나와 상관없이 펼쳐지는 일에 대하여는 이제 맡기신 이의 주도하심을 인정한다. 주가 하실 일이 있으신 것이다. 계획하신 바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오직 하나, 나는 주만 바라며 할 일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면 나는 어떤 일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저들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 굳이 나서서 뭘 어째보겠다고, 하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에 대하여는 경계해야겠으나 주가 그리 행하신 일이다. 신학의 깊이를 위해 더 다양한 것을 접하라는 선생의 말에 나는 말없이 웃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그럴 수 없다. 나는 예전이 좋았다는 선생의 말에 웃음뿐이었다. 그래봐야 어린아이 적의 일이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함께 하였던 짧지 않은 긴 세월 동안 저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신으로 두고 살았고, 그 모습이 그럴듯하여 나 또한 같은 길을 갔던 거였다. 여전하여서 저는 누구보다 성경에 해박하여 그 너머의 자기 생각을 신봉하는 것이었으니. 들어주는 것으로도 이를 내게 보내신 이의 뜻을 다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하였다.
허투루 그냥 허락하시는 일은 없다. 이제 그리 확신한다. 나는 뭐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의 내가 부럽다는 소리와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인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 그것을 어찌 꾸며서 내보일 수 있는 것이겠나.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 3:5-6).” 새삼 저의 말에 휘둘릴 거는 아니었다. 때가 되어 그 긴 시간을 소원하게 두시더니 새로 이으심으로 저를 돌이키게 하시려나, 이젠 기도 제목이 되었다.
이 모든 게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 예전에 안고 씨름하던 문제를 새삼 물으니 것도 신기하기는 하였다.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둥, 교회를 그럼 교회답게 꾸려가라는 둥, 보다 넓고 다양한 시야를 가지라는 둥. 나는 저의 말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거기’ 있는가? 여전히 그 일을 등에 지고 있는가? 때론 우리가 아는 게 병이다. 다만 내가 이제 주의 영광을 위해 저이 또한 마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저의 열띤 언변에 성경의 진리가 다 담겨 있었다.
자신이 말하면서 자신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수는 본래부터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을 저는 범신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고, 나는 이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는 성경의 원리로 이해하였다. 아는데 믿지 않은 이가 어디 한둘인가. 자기 안에 예수가 늘 계시다면서 여전히 예수와 상관없이 사는 동안을 위태롭게 여기지 못하다니. 또 이를 위태롭다고 알면서 정작 주를 바라는 데는 소홀할 뿐이라니. 나의 모순이 저기 있었구나! 선생의 말 속에서 예전에 내가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자꾸 결과를 내려 하고 어떤 성과를 보려 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은 각각이나 그것이 어떻게 땅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으니, 자라게 하실 이는 주님이시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 32:20).” 아이가 여전히 교회로 나오는 것에는 쌜쭉하여 더는 요구하지 않았다. 주가 이끄셔야 할 일이다. 선생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저를 돌이키실 이는 주님이시다. 저의 말 속에 이미 답이 있었다. 다만 그리 살지 않을 뿐이다.
다만 나는 저를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성령이 정하신 일이다. 저의 형편을 살필 때가 되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저가 등한히 한 예수를 내가 받은 것이다. 저는 저에게 빚졌다. 주의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게 옳았다. 피곤하고 괜한 만남인 것 같으나, 주가 어찌 이루어 가시려는가!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주의 사랑이다. 나의 그리움이나 선생의 회상으로가 아니다. 십여 년이 훌쩍 넘었으니 꽤 긴 시간을 떨어뜨려두셨다. 이제는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4).” 주가 저를 돌이키려 하심이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의 자리로 저를 이끌 의무가 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오후께 친구가 ‘틱 장애 아이’ 수업을 마치고 전화를 하였다. 고1 아이와의 수업이 어린아이 같은 거라. 엄마에 대한 글에서 아이는 구구절절 감추고 있는 게 많았다. 나는 기도로 할 것을 당부하였다. 우리가 어찌 아이를 다루겠나. 모두가 병든 경우이다. 아무도 아프단 소릴 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다. 그런 가운데 불안을 느끼고 두려움을 호소하고 이로써 일상을 어려워하는 것이 어쩌면 정상이다. 두려워할 줄 모르고 안 그런 척 하고 사는 게 죄의 온상이다. 주 앞에 내어놓고 기도로 아이를 대하기를 당부하였다. 작은 변화에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이가 이끄실 것이다. 나는 그리 말해주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주가 이루시는 일이다. 우리가 하는 건 주님 대신 그 자리에 있는 일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61:1).”
이로써 주가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었으니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2-3).” 뜬금없는 선생과의 만남에서부터 친구의 들뜬 마음에서도 주의 생각을 듣는다. 아이는 여름 감기로 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제 시간에 맞춰 글방으로 왔다.
아이가 화장을 지우고, 길게 기르던 손톱을 깎았다.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순간에 뿌려진 씨앗이 새순을 돋으며 자라나 튼실하게 주의 나무로 자랄 것이다. 다만 나는 주의 말씀을 뿌리는 자로 혹은 물을 주는 자로 곁에 있었을 뿐이다. 자라게 하시는 이가 또한 이 모든 우주의 질서를 창조 계획에 따라 이뤄 가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라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내가 무던하여야 할 기준이었다.
받은 게 많은 만큼 또한 내어줄 게 많은 법이다. 주가 이루신다.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시 72:6-7).” 그러므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8-19).” 나는 다만 그의 증인이라. 결코 오늘의 나는 거저 된 게 아니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내게 두시는 한 날의 수고가 족하였다.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 7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