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린도전서 8:2-3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 73:26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 그리하여 나이 들어 몸은 쇠하고 마음은 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다. 흔들림이 없다. 영원한 분깃이시다. 내게 물려주신 상속이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 고난으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나는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눌 14:27).” 단지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아니었다. 이를 주의 이름으로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다. 사는 데 따른 우여곡절을 십자가로 여긴다면 여느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게 없겠다. 나는 감당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니. 때론 힘에 겨운 듯 하나 무겁지는 않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이 안에 진리가 담겼다. 멍에를 메고 따르는데 그 마음엔 되레 쉼이 있다.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 종종 내가 처한 이런저런 상황을 말할 때 힘들다는 표현을 하기가 민망할 때가 있다. 누가 들으면 참 힘들겠다, 고생한다 하겠지만 그러해서 오히려 면구스러울 때도 있다. 실제 보면 힘든데 힘들지 않고 힘에 겨워 벅찬데 생각보다 수월하였다. 아이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누구에 대해 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하여도 새롭게 알게 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이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 그렇게 알게 하시는 놀라운 은총에 대하여. 하루가 지나면 금세 알 것 같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을 때 훤히 읽히는 은혜의 것이다. 내게 두시는 한 날 한 날의 수고의 은총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를 잃으면서 본래의 ‘나’를 밀쳐내고 내가 되었다. 그 ‘나’는 본래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가장 안식을 얻을 때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를 멀리할 대 그 생이 고달프다. 사느라 열심을 다해 사는데도 살면 살수록 힘에 겨워 어렵다. 모두를 ‘너’로 돌리고 ‘나’로 내가 주인이 된 까닭으로 일상의 모든 것을 ‘나로서’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으며 크게 공감하였다. 전날에 선생이 와서 쫓기듯 말에 말을 이어가던 이유를 알겠다. 알 수 없는 어떤 조바심에 쫓기고, 쫓기는 마음으로 사느라 사는 날 동안 사는 게 지옥이라. 그런 이의 눈에 ‘우리’의 신앙은 미련한 것이요 아니꼬운 게 된다. 어불성설 말이 안 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어쩌겠나?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역설하여 저를 설득할 것인가? 성경이 성령의 기록으로 된 것처럼 성령의 이해가 아니면 누가 알겠나? 하나님 앞에 감사라.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되는 일이다. 이를 아는 자들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붙드시는 것 같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고전 8:2-3).”
주께서 알아주시는 사람으로 사는 일이 귀하다. 비록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그것으로 충분하여서 감사는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전에는 이 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 미련하게도 보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이 내게 두시는 은총이었다.
아이가 2박3일 어느 교회 어린이 성경학교를 참여하고 무사히(?) 왔을 때의 기쁨 같은 것.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 주일 날 주 앞에 나아와 예배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 비록 저의 병명이 또 연약함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눈총이 되고 안타까움이 된다 해도, 그것으로 사느라 사는 날 동안 어려움과 고달픔이 이어진다 해도. 나는 전날에 다녀간 나름 열심을 다해 성공을 추구하고 자기 삶에 자부심으로 뭉쳐 있던 선생의 것보다 귀하였다. 이를 염려하며 안쓰러워하는 저의 이모 약사아이보다 훌륭하였다.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장하다, 하고 칭찬하였다.
주가 이루시는 날 동안 누가 먼저 갈지, 어떤 일에 처할지 누가 알겠는가.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이를 끝내 깨닫고 주 앞에 돌이키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게 허사라. 이제 다 늙으신 아버지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곁에 앉은 아이의 진심어린 마음을 느끼며 이를 통해 감사와 영광을 올릴 수 있는 오늘의 내 삶이 복된 것을 알았다. 때로는 힘에 겨워 쩔쩔매는 게 사실이지만 그와 같은 힘듦까지도 주의 축복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나와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드는 생각은 그저 안타까움뿐이었다.
나에게는 모든 게 가하나 모든 게 주를 향하였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그래서 주의하는 것일 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6:12).”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3-24).”
문득문득 전날에 선생의 열변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것도, 주일을 권하지만 여전하여 미적거리는 아이의 안이함도, 그저 사느라 정신이 팔려 피곤에 겨워하는 여러 ‘엄마들’의 고단한 삶에 대하여도. 내 안에 두시는 숱한 마음쓰임으로 나는 주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의 ‘나’는 하나님이셨고, ‘너’로서 나는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거였다. 그것을 죄로 인하여 ‘너’였던 내가 ‘나’로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본래의 내 자리였던 ‘너’의 위치에 재물을 출세와 성공을 탐심과 부러움을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오늘 아삽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 73:1-2).” 왜 그런가?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3).” 영락없다. 신기하리만치 잘 되는 일도 있었으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12).” 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 같은데 항상 평안하고 오히려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을 보면 부럽다. 부러우면 섰다가도 미끄러지게 돼 있다.
심지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4-5).” 이것으로 겨눠 축복을 운운한다면 도대체가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6-9).” 선생이 선생으로 내 앞에서 여러 말을 했던 것도 그러해서였을까?
전에는 그게 교훈이 되고 훈계가 되고 가치가 있어 보였으나,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 오늘 본문은 묵상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새롭다. 내가 세상을 보고 안 믿는 혹은 하나님을 배척하면서도 잘 되는 이들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주눅이 들 때면 크게 교훈하신다. 그럴 때면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 정말 내가 이러고 있는 게 헛수고는 아닐지 불안할 때도 있다.
그렇지!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 그 생이 더욱 허망함이다. 그렇듯 나름 한 생을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다고 해서 이 땅에 영원히 뿌리 내릴 수 있는 건강도 부유도 명성도 없음이다. 도리어 이제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흔들렸던 마음이 아이의 순수함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2-23).”
나는 비록 몽매하여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듯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리기 일쑤지만,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4-25).” 비로소 이제는 고백한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6).” 나이 들어 병들고, 고달픈 육신으로 하루하루를 사느라 질질 끌려다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하심이 복이다.
내가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