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전봉석 2018. 7. 20. 07:1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시편 77:12

 

 

초딩 5학년 사내아이다. 학업이 부진하고 성품이 어눌하여 뭘 하든 따라오지 못한다.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고 읽은 내용을 이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야기로 들려주고 말해주어야 간신히 그 내용을 알겠다는데 들은 것을 정리해서 써보라고 하면 암담해한다. 우리는 같이 잠언을 한 장씩 읽기로 했다.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읽히고 그 가운데 마음에 닿는 구절을 정해 필사를 시킨다. 그 뒤 그 내용을 이해한대로 설명을 써본다. 이를 연관지어 자기 생활 속에서의 이야기로 가져온다. 물론 아이는 모르겠다며 가만히 있다.

 

공책에 그 내용을 천천히 옮겨 적게 하였다. 더는 방법이 없다. 근신이 뭐예요? 명철이 뭐예요? 하는 아이들의 질문이 있을 때마다 그 뜻을 일러 생활에까지 연관시켜 들려준다. 그렇게 누구는 400자 쓰기도 버거워하고 누군 엉뚱한 소리지만 400자를 훌쩍 넘겨 뿌듯해하기도 한다. 아무리 책을 읽히려 해도 소용이 없고 어떤 내용의 글을 자발적으로 써보게 해도 별 수 없다. 잠언으로 읽고, 생각하고, 쓰자.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욱 속상할 때 간절하여진다.

 

일흔 살 모친은 우울증으로 인해 식음을 전패하였다. 기력이 쇠하여 자꾸 누우려고만 한다. 목사님, 나도 약한 사람입니다. 운전하다보면 울컥, 하면서 요즘은 자꾸 눈물이 납니다. 부친은 건너와 덩달아 힘겨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차라리 어디가 부러지고 병이 난 거면 낫겠는데, 이건 뇌의 이상이고 마음의 병이라고 하니 자식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이게 원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럴 거면 그냥 죽어! 하고 면박을 주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고. 그 심경을 내가 어찌 다 알겠나만 뭐라 한들, 저이는 듣는 이가 아니었다. 괜찮다면 화요일 목요일은 오전에 아이가 오지 않으니까 여기에 오시면 어떨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믿는 이로서 저가 속엣 얘길 꺼내놓으며 주께 같이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우선은 그렇듯 거동할 수 있는 기력이 돼야 하고, 아무래도 아들과 그 남편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라 본인이 오려하겠나 싶었지만, 다음 일은 주가 알아서 하실 터. 나는 며칠 전부터 마음에 주시던 생각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처방 가운데 하나는 부친이 주일 날 모친과 함께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기력이 없어 힘들어하시니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가보시라 권하였다. 한데 의외로 발끈한다. 자기는 죽어서 벌 받아야 한다면 벌 받겠단다.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 뭘 더 잘할 수 있겠냐며 항변이다.

 

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우리가 예수를 주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이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 앞에 나는 어안이 다 벙벙할 정도이다. 왜 저이는 그게 그처럼 어려운 것일까? 어머니가 아프시니까, 그러는 동안만이라도 해보시라 했던 말에 죽음 너머의 일까지 운운하며 발끈하는 심경이라니!

 

결국 교회 저편 조산원 자리에는 마시지업소가 들어오기로 했다. 주방을 저들에게 주어 우리는 다용도실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 통하는 문을 막기로 했으니 차라리 그게 낫다. 아무래도 불편하기는 하겠으나, 어차피 그리 된 일. 내가 뭐라 할 게 아니라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저도 어쩌겠나? 계속 공실로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늙으신 사모는 표정이 어두워 시무룩하였다. 힘내시라, 인사를 건네며 나 역시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그러할 때 우리의 특권이다.

 

구원은 날마다 매순간의 요구다. 죽고 난 뒤의 막연한 일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저가 살아온 생이 거칠고 힘에 겨웠던 만큼 그 고집이 더 완고한 것이겠으니. 어머니 일에 대해 사장에게 말해둘까, 하다 그만두었다. 부친이야 늘 스스럼없이 건너와 차 한 잔씩 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니 그리 권하였던 것이고. 우리는 곁을 나란히 하는 사장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우리 입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저쪽이야 어쨌든 출구가 서로 다른 셈이니 그나마 나은 것일 테고.

 

공연히 속상하여 다 저녁이 되어서야 설교 원고를 조금 더 작성할 수 있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죄에 대하여’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자세를 명확히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성경의 가장 선명한 구조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모시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다들 나름의 자기주도적인 삶을 운운하지만 우리는 사는 날 동안 무엇에 또는 어떤 것에 의해 종노릇한다. 의에 대해서든 죄에 대해서든, 이에 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 하는 이 기본적인 진리를 붙든다. 본문을 읽다 유의미란 세 가지 타동사를 발견했다. ‘여기다’와 ‘지배하다’와 ‘드리다’라는 동사인데 이는 모두 타동사다. 타동사란 그 정해진 대상에 의해 행위가 목적을 갖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의 자동사가 아니라 무엇에 의한 동작이다.

 

앞서 11절에서의 ‘여기다’는 타동사를 주목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이는 엄연한 행위다. 그리 여기고 마는 의식이 아니라 그에 따른 동작을 규정한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긴다는 말씀은 다음 절에 이어지는 구체적인 규정으로 그 동작이 정해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

 

먼저는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전에 즐기던 것이 여전히 나의 위로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 구조는 이 ‘지배하다’에 의해 돌도 돈다.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느 9:28).” 곧 무엇에 의해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피조물의 특징이라.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자는 죄의 지배를 물리칠 능력도 된다.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는 것,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드려야 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이는 곧 ‘행위로 드러나는 선택의 의미’다. 모든 행동은 선택에 따른 결과다. 우리의 선택은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릴 수도 있고 더욱 황폐하여져 메마를 수도 있다. 자신을 어찌 ‘여기고’ 무엇으로 ‘지배하고’ 과연 무엇에 ‘내어드리는’ 삶인지.

 

문득 드는 생각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였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하셨을 때, 저에게는 세 개의 선택 항목이 주어졌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든지, ‘그런 일이라면 남편 될 요셉과 상의해서,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든지. 만약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더라면 저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지 못하셨을 것이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는 세 번째 선택으로 저는 그것을 주의 말씀으로 여겼고, 자신의 여러 불가능한 현실을 물리쳐 지배하였고, 이에 그 몸을 내어드렸다.

 

말씀을 준비할 때면 늘 선명하고 뚜렷한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신다. 이는 오늘 이 모든 나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왜 저이의 우울증이 섭생의 어려움을 동반하고 있는지, 이를 곁에서 보는 이의 그럼에도 완고한 자기주장이 어째서 그러한지, 단지 연세가 많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치부하고 마는 안 믿는 자식의 아둔함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만 주께 아뢰고 기도할 뿐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같이 와서 주께 아뢰며 속에 쌓인 말들을 토해내면 될 일이기는 하겠는데, 공연히 자식과 남편에게 누가 될까 하여 본인이 또 그러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안타까움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그들 부모의 조바심치는 병적인 간섭을 같이 느끼면서, 백날 떠들어봐야 그 귀에 들려지지 않는 소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다만 기도제목으로 저들을 노트에 적고 생각날 때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그러라고 오늘 우리를 여기에 두신 것임을 이제는 확신한다. 많은 교회가 있고, 다들 더 많이 더 크게 더욱 더 부흥을 바라고 나아가는 가운데서 우리처럼 이렇게 되도 않는 일에 전념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시라. 그리 여기고, 그래서 다른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나를 먼저 내어드려야 하는 일이어서!

 

지치고 힘들 때,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시 77:12).” 오늘에까지 주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긍휼하심으로 함께 하시는가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되뇐다.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