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전봉석 2018. 7. 25. 07:23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5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시편 82:6-7

 

 

 

누구의 죽음을 두고 신망 높은 두 목사가 뭐라 운을 뗐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러는 소리겠으나, 이를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운운할 건 아닌 듯하였다. 저가 정의롭게 살았다고 해서 저보다 못한 이를 빗대어 얼마를 더 해먹고도 잘만 사네 어쩌네, 또는 마귀가 늘 불의를 조성하다가 이에 죄책을 동원하여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사람을 끌고 가네, 하는 식의 소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는 비웃기나 하듯이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지난 국정농단의 중심에 있던 이가 선교사로 나간다는 기사를 보고도 같은 느낌이었다.

 

말이 너무 쉽고, 넘치는 말로 오락가락하는 세상에서 ‘말씀 밖의 이야기’는 혼잣말로도 조심스럽다. 이에 딱 맞는 말씀이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마치 우리가 무얼, 누굴 판단하고 어떤 일에 대하여 정의하듯 굴어서는 안 된다. 우린 모두 같다.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애쓰고 수고하여서 의인이라 하신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속상하다. 어제오늘 울고 싶은 아이처럼 마음이 어려웠다. 하지만 기독교 신문에 실린 저와 같은 기사를 보면서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을 생각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주의 사람은 마귀에 이끌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리 놓아두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지 않는다. 사탄이 이길 수 없다. 그의 살아온 행보가 아무리 선하고 의롭다 해도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삶은 세상 가운데서의 순종의 삶과는 다르다. 어떤 이의 죽음을 두고 그를 애도하는 마음에서 마귀의 승리로 또는 더 나쁜 이들에 대한 비난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주 앞에 설 수 없다. 우리의 순종은 그 목적이 분명하다.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낙후된 삶의 현장을 개선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 2:5).”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리 읽힌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오직 주만을 바라고 사는 삶은 오히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생애처럼 조용하다. 아무 것도 이룬 게 없고 한 것도 없는 것 같으나, 주신 바 ‘그 삶’을 다하는 것이다.

 

‘그 삶’은 아이의 고단한 하루에서도 드러났다. 첫 출근길이 서툴러 마침 형이 같이 동행을 한 모양인데 서로 헤매다 간신히 지각을 모면한 모양이다. 하루는 어땠는지, 약사인 이모는 노심초사 나에게 아이의 안부를 전하고 아이엄마는 그 속이 오죽하겠나! 나는 그저 괜찮다, 괜찮다, 잘할 거다, 걱정하지 마라, 같은 말로 위로 할 뿐이라. 다섯 시를 넘겨 퇴근하는 길에 아이와 카톡을 하였다. 여러 번 실수를 많이 했고, 일이 힘들었고, 그런데 점심은 맛있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안 됐다. 그런 와중에 집 근처 어느 문고에 들러 30분만 책을 보다 가려고 한다는 말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지능이 떨어지고 어눌하여 저 아이를 염려하지만 아이는 그저 주신 삶에 충실할 뿐이다. 힘들면 숨기지 않고 무엇에 대해 먼저 위선을 떨지 않으면서, 글방목사님! 토요일에 글방에 갈게요. 하는 아이의 말에 그저 나는 그저 울컥하는 수밖에! 우리는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사로’로 사는 삶.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단 한시도 바로 살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주 앞에 고하는 일. 그리하여 묵묵히 주를 바라며 주만 의지하는 삶. 병약하면 병약한 대로,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또 잘못을 저질렀으면 수천 번이라도 주 앞에 회개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으며 또한 연약한가. 누가 누굴 뭐라 비난하고 판단할 수 있겠나. 어떤 이의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를 선의로 해석하려는 자체가 우문이라.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을 그리 방치하지 않으신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시 82:6-7).” 우리의 신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덴 그만한 어려움을 자처하는 셈이다. 제 살에 덴다. 제 생각에 걸려 넘어진다. 그래서 우린 허망하였다.

 

지혜자는 일갈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저를 지능저하로 또는 불안장애로 조현병으로 그리 두심에 대하여 우리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듯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운운할 일이겠나? 다만 우리가 할 일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둘 다 주의 섭리다. 주가 주관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15).” 인생이 그런 것이다. 사람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고 스스로 한 치 끝도 분간하기 어려운 게 마음이다. 그러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6-17).”

 

자신의 신념과 확신이 자신을 망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놓이는 순간 모든 게 허사다. 그래서 우린,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이 모든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 하는 일도 하나님이시면 그러실 수 있다. 그러니 중간이란 없다. 하나님으로 온전하여지던가, 본래부터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것이거나.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딤전 2:11).” 남자 여자로의 여자이겠나? 우리는 주의 여자라. 그의 신부라.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저런 기사를 보면서도, 아이로 인한 내 마음이 그 가족들의 마음이나, 당장 더위에 지쳐 허덕거리는 하루에서 힘에 겨워 고통스러워하는 일이나. 주의 사람으로 일체 조용히 배우라. 그리하여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3:4).” 더욱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누가 어떻고 뭐가 어쩌니 하는 따위는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 9:11).” 모든 일에 넉넉하여 드려지는 삶으로 족한 것이었으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저녁께 기도회로 모여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말하는데, 뜬금없이 아내는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돌아보면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다고 하였다. ‘그런 아이’고 ‘저런 아이’고 아이들을 붙여주시고 이제는 그 영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일에서까지.

 

한 아이의 딱한 사정이 자꾸 마음에 밟히는 거라. 부모가 이혼하여 각각 또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렸고, 적당히 돈이 있으니 아파트를 하나 사서 아이를 맡아 키우는 늙은 보모를 두었다. 엄마라는 이는 여러 곳에 노래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남자도 자주 바뀌는 모양이라. 이제 5학년 여자아이는 스스로 팔목을 그어대며 세상이 어지러울 뿐이다. 학교에서는 저 아이를 요주의 인물로 각별한(?) 감시가 따르는가본데 우리에게 맡기신 두 아이가 저 애랑 또 단짝이라.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기를 저 애도 우리에게 붙여주시던가!

 

나 몰라라 하고 아이를 등한히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 비록 아이들이 교회로 오지 않고 함께 예배의 자리에까지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해도, 나는 중3 아이가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와서 같이 먹을 때 일부러 기도를 한다. 같이 기도하고 먹자, 하면 아이는 머쓱한가보다. 나는 일부러 더 그런다. 교회로 나오고 예배에 참여하는 일이야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리 하셔야 할 일이고, 우리는 다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삶으로 살아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모든 게 주의 뜻이라.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이 명백한 사실 앞에 유구무언이라. 말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우린 혼잣말처럼 주 앞에 아뢰는 것으로도 족하다. 누구에게 일러 그것이 보도가 되고 저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이 조심스럽다. 누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고 누가 적당하여서 용서가 쉬운 죄인인가?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전적인 주의 은혜가 아니면 99점이나 1점이나 똑같이 낙제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주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다만 분수에 맞게,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그러므로 ‘일체 순종하여 조용히 배우라.’

 

주신 바 그 믿음의 분량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날들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7).”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정 또한 주께서 이뤄 가시는 여정이라. 그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만나 저 아이를 위하고 기도하며 주를 바라는 일이었으니.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11).” 기도로 감사를 배운다. 힘에 겨운데 족한 날들이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12).” 지금은 그저 부분적으로 알고 일시적으로 놓여날 수 없는 날들이 더 많으나, 우리 안에 두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증언하신다.

 

이는 확실하여서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13-14).” 기필코 그러할 것이다. 곧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18).”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