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후서 2:14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8
성경이 알게 하시는 기쁨은 내가 아는 기쁨보다 깊다. 오겠다던 중3 아이가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본문을 정리하고 있던 게, 설교 원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 기쁨은 나를 온순하게 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귀 기울이게 한다. 금요일로 미룬 시간 때문에, 앞서서 본문만이라도 정리해둔다는 게 그만.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나의 날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귀하다.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고 절규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신기하지? 나는 노모의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닌 걸 알겠는데, 저는 처의 그런 상태를 가벼이 여기고 마는 것이다. 주를 바라길 바라면, 이런 소릴 참 듣기 싫어한다. 아이의 상태가 심각하여 당장 팔목을 긋고 죽을 것처럼 공포에 휘둘리는데도 ‘종교적인’ 이유로 더는 나의 안부에도 대답이 없다. 기껏 잘 지내다가도 구원을 호소하면 원수처럼 대한다.
가장 쉬워서 너무 어려운 게 구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그냥 거기까지, 더는 선을 넘어오기도 넘어오게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니 어찌할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말씀 앞에서 나는 어렵다. 어떻게, 그래도 연락을 취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됐다, 하고 내버려둬야 하는지. 알아서 하게 둬야 하는지. 그럼에도 또 다시 말해주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요즘 우리의 기도제목이 늘어가는 까닭은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서이다. 다들 그 정도 선에서 친하게 지내길 원한다. 복음을 바라지 않는다. 병고치고 배고픔을 모면하는 정도이면 됐지, 하나님을 믿고 바라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하긴 더 좋은 게 세상에는 널렸다. 보다 직접적이고 효과가 빠른 게 세상에는 더 많아 보인다. 하긴 종합검진을 하고 뇌파검사에서도 이상이 없다고 뜨니, 그럼 됐지! 하고 노인은 장담하는 것이다. 굳이 하나님을 바랄 게 없어진 듯 보인다.
아, 이런 것이었겠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내가 해야 할 것을 한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은 그렇게 하루 종일 걸렸다. 등짝에 땀이 흐르고 커다란 선풍기 바람은 얼굴을 때려 얼얼하게 하는데, 저들의 방종과 무감각에 넌더리가 나다가도 나 역시 그렇듯 외면하고 가벼이 여기며 살았는데,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주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의 오늘은 묘연한 것이었으니,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저들의 회심이 아니라 주의 은혜다. 저들이 돌이켜 주 앞에 나오길 바라는 마음보다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데 더욱 확실한 것이었다. 오후께 아이와 카톡을 하며 오늘은 어땠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할 만한지, 노심초사 드는 이와 같은 마음이 나 역시 마냥 신기하기도 한 것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면 될 일인데, 내 안에 이는 염려나 근심이 더욱 주의 은총을 바라게 하는 것이었으니!
이것으로 승리하게 하시는구나.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언제부턴가 내가 그러면 그러려니 하고 마는 저들의 태도에 서운할 거 없다. 그 냄새는 이제 내 냄새가 아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5-16).”
그래서 어떤 이는 ‘종교인’이라 못을 박고 딱 그 정도 선에서 더는 다가오지 않으려 하는 것이기도 하고. 글방은 좋은데 교회여서 싫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고집을 무슨 수로 꺾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게 늘면 늘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어쩌겠나? 저의 마음을 열 수 있게도 교회로 예배로 나오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모여 하루 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기도제목으로 삼는 까닭은 그래서다.
딸애는 그 회사의 부사장과 과장을 두고 마음이 자꾸 쓰이는 모양이다. 나이 많은 사장은 약간씩 노망 끼가 있고 저의 아들딸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 도도하고 무례한 저들 태도에 처음엔 불쾌하다가 이제는 안타까움으로 위해 기도한다. 어제는 곁에 앉는 과장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며,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와 말문도 열고 웃기도 한다면서 좋아라하는 것이다. 그리 마음을 두게 하시는 일. 더 배우고 더 가졌고 더 좋은 여건을 가진 저들을 두고 우리는 기도할 줄 안다. 이를 사역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우리의 냄새가 곧 그리스도의 것이라. 이 냄새를 지울 수 없다. 누구는 노골적으로 ‘글방은 좋은데 교회여서 싫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인 것이다. 싫든 좋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에게서는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여겨지니 뭐라 한들 저가 좋아하겠나? 하지만 또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니 우리라도 우린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오늘 나는 말씀 앞에서 새삼 우리의 감출 수 없는 드러남에 대하여 이해가 된다. 할 게 없어서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대하여 난들 그러는 내가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대체 왜 저 아이 때문에 노심초사하는지! 딸애가 왜 사장 아들 부사장의 무례함을 두고 위해 기도제목으로 올리고, 오빠와 아빠에게 무시당하듯 함부로 여겨지는 뚱뚱이 과장을 안쓰러워하며 챙기게 되는 것인지. 누가 먼저 점심 먹으러 가자해도 어려워하는 저의 병적인 외면을 놓고 우리는 기도한다.
아내는 몰지각한 아이엄마들을 두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그 몰상식함에 치를 떨면서도 위하여 기도한다. 아이의 상한 심령을 놓고, 그 영혼을 주의 마음을 마주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제목으로 삼는다. 실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못 견디겠는 일들이어서 말이다. 도무지 좋아하고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마주대하는 일은 피곤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외면하고 마는 게 상책인데, 자꾸 주님은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일부러 우리 곁에 두시는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어찌할까?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주를 생각함으로 저를 받을 수 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어서, 기껏 오겠다고 하여 시간을 비웠다가 돌연 해가 따가워서 오기 싫다는 아이를 또 이해하고 수용하며 그럼 금요일에 오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하는 일이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도, 어쩌겠나! 저들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그러는 것을.
아이는 좀 어떤지? 어떤 치료를 계속 하고 있는지? 하고 걱정이 돼 안부를 물었는데 며칠 째 더는 대답이 없는 이를 두고 괘씸하고 어이가 없다가도 어쩌겠나? 저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언제가 어떤 아이가 ‘선생님으로는 좋은데 목사님으로는 싫어요.’ 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게 뭔지, 왜 그러는지, 나는 잘 안다. 그렇듯 흘려버린 세월이 껑충껑충 10년씩이었으니, 그 사이 잊히고 더는 연락이 끊긴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게 나였다. 가만 보면 내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이 실은 다 예전의 내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더는 거부할 수 없는 냄새, 우리에게서 나는 향기가 그리스도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 안의 그리스도 때문이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그 모습 그대로 사는 게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실현하는 삶으로,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