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전봉석 2018. 8. 1. 07:16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린도후서 8:7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편 89:14

 

 

주는 선하시다.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더하신다. 일주일도 못하고 회사에서 잘린 것이니 아이 심정이 오죽할까. 본인도 그렇지만 그 가족들의 마음은 또 어떠할지. 안 됐다, 하는 정도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같이 영화를 보러가자는 말에 아이는 너무 일찍 왔다. 같이 요한복음을 읽었다. 아이의 기도는 간절하였다. 영화관에서 나는 긴장했다. 안정제를 먹고도 힘들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인내를 통해 사랑을 배운다. 주의 마음이 아니면 아이를 대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이에 참고 견디는 선은 착한 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주님의 위로가 되어주는 일이다. 측은지심이 아니다. 주의 마음이 필요하다. 아이는 아이라,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마음을 잘 이겨내는 것 같았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아이에 대해 이런저런 말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속상함을 토로하지만 정작 그것으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주목하는 것이 귀하다. 우리가 현재 겪는 고통, 그 어려움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 기초는 주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게 하신다. 고난으로 우리는 주의 사랑을 배운다. 무더운 날,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내내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기진하여 쓰러졌다. 아내가 일찍 와서 같이 기도회를 가지고 올라왔다. 나는 침대에 눕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역시 하나님은 잠을 주신다.

 

보면 넉넉하고 남아돌 때 풍성한 게 아니다. 오늘 말씀은 이를 확인시켜주신다. 문제는 있고 없고가 아니라,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나는 아이 일로 징징거리듯 염려만 앞세우는 약사이모에게 말했다. 우리의 측은지심으로는 망한다. 주의 마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늘 우리가 기도로 올리고 주께 바라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염려가 없을 수는 없으나, 그래 맞다.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이어야 한다. 어제 묵상했던 내용으로 저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글씨로 천천히 옮겨 적으며 묵상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똑같은 근심인 것 같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과 세상 근심은 다른 것이다. 아이를 두고 갖는 안타까운 마음이 그저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아멘 한다. 왜냐하면 말씀과 같이 나로 하여금 더욱 간절하게 한다. 주밖에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한들, 나는 기꺼이 변증한다.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더욱 선명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바라지 않을 때 분개한다. 주를 앎으로 우리의 무지를 두려워한다. 나의 연약함이 주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그것으로 열심을 다한다. 스스로 견디고 이겨내게 자신을 벌한다. 주 앞에서 깨끗하기를 바란다. 남이 뭐라 하든, 같은 근심인 것 같으나 전혀 다른 결말을 도출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견딤에 대하여,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6:7).” 서게 하신다.

 

이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 이와 같은 역설적인 논증이 나는 즐겁다. 같은 근심인 것 같으나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주신다.

 

영광과 욕됨이 그러했고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 그러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았다.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지 않는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쁘다. 가난한 것 같으나 부요하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걸 가졌다. 나름 나보다 더 돈 잘 벌고 똑똑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듯하나 저의 근심은 저를 죽이고 나의 근심은 나의 영혼을 살린다. 이와 같은 논증이 단지 그렇다는 추상의 의미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으니, 목사님 내일 성경공부 올게요. 하고 돌아서는 아이를 보며 주의 살아계심을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곧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시 89:14).” 글쎄! 나 또한 번번이 실의에 빠지기 쉽고,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근심은 그래서 더욱 주만 바라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을까? 말 그대로 내 코가 석 자인 사람인데 말이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오늘 본문이 확인하고 계신다.

 

주께서 가난해지심으로 내가 부요하게 되었다. 그러니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12).” 내게 할 수 없는 걸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주신 마음, 할 마음만으로 족한 것이다. 이로써 온유를 배운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이것들은 하나이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12).”

 

이를 위하여 오늘 나를 여기에 두셨다.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를 타국으로 데려다 그 자리에 있게 하시는, 놀라운 섭리다. 우리는 이를 불행이라 여겨 근심하나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만국에 알리시는 데 ‘그의 종들’을 사용하신다. 보잘것없고 실은 별로 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 나는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하여 누구에게 말해주려 하면 민망하다. 그런 걸 다들 용케도 잘만 나타내고 산다. 책을 내고, 어떤 모임을 구성하고, 사업으로 확장하고 ‘더 큰 일’을 도모하려 드는!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이것뿐이라. 누가 부추겨 뭐라 나를 높이려하면 오히려 그것이 민망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아이 일로 누가 자꾸 고맙다고 할 때 실은 그런 소릴 들을만하지 못하여 면구스럽다. 주가 하신다. 하게 하신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고후 3:10-11).”

 

주께서 나를 건져주신다. 우리는 단지 나아지길 바라고, 어떤 성과를 기대하며, 남들처럼 사는 삶을 꿈꾸지만 하나님은 그 정도를 위해 오늘을 건설하신 게 아니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시 89:11).”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와 같은 어려움도 주의 것이다. 주의 것이라면 주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하고 필요한 것으로 오늘을 건설하고 계신다. 보면 말씀이 딱딱 맞는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5).”

 

뭐 그리 대단할 줄 알았더니 결국 목 디스크 하나로 쩔쩔매는 주제의 인생이라. 세상을 호령하며 다 가진 듯 떵떵거리며 좋은 차 몰고 좋은 거 먹으면서 천년만년 살 줄 알았는데, 그러니 오늘 우리 앞에 두시는 이 모든 교훈이 주의 인도하심이다.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21).” 언제든 나 역시 헛발질 할 수 있다. 헛디뎌 넘어질 수 있다. 다만 내가 한 가지,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시 89:5).”

 

돌아보면 산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가.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47).” 그 가운데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게 그럼 무엇일까?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