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를 높이리라

전봉석 2018. 8. 3. 07:44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고린도후서 10:12-13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편 91:14

 

 

나는 내게 더하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 속된 말로 한 놈만 팬다.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씨름한다. 마음에 걸리는 여럿보다 직접 마주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말씀 앞에 선다. 말씀만 붙든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는 그리 두시는 이만 바라고 의지한다. 측은지심은 시야를 흩뜨린다. 주의 마음이어야 한다.

 

애가 보배다. 그리 여겨지는 것은 너나 나나 그 아이엄마나 아이로 인하여 우리는 각기 주를 바란다. 도우심을 의지한다.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억매이지 않되 사랑하고 사랑함으로 주의 계획과 섭리를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부디 이 땅에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너머의 영생의 영원함에 대하여 눈을 뜨길. 단지 이 땅의 일로 씨름하는 것이라면 우리보다 서글프고 한심하고 처량한 삶이 어디 있겠나? 그게 아니다.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럼 주가 하시는 일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아이 일로 시름하며 톡을 주어 한참을 그리 위로하였다. 참으로 더운 날씨였다. 아래층 카페에 내려가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한 마디로 영생의 영원함에 대한 주제로 로마서 8장 26-39절 말씀을 붙들었다. 구원이란 율법으로 완전하여 의인으로 살든가, 이를 완전히 이루신 이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든가 둘 중 하나다. 그 율법의 요구를 예수께서 채우셨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리하여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되셨다.

 

우리는 그의 새 생명을 가지고 산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 이는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7:4).” 그러므로 나도 율법의 의로움을 이루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4).”

 

이는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심인데 저절로 그리 뚝딱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적인 순종에 따른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19-21).” 곧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의 지시를 받는 삶을 산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이를 한 마디로,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로 나타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나는 자주 놀란다. 아이 일로 누가 마음이 상해 위로하게 되었는데, 마침 설교 원고를 위해 본문을 읽으며 같은 맥락의 말씀을 짚어가고 있을 때의 일이라. 딱 들려주어야 할 그 대목의 말씀으로 말하게 하시니, 서로 주고받는 카톡이 곧 설교가 되는 것을 느꼈다. 말씀을 전하는 일.

 

그리 되게 하시는 과정이 놀랍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아끼셨으면서 자신의 독생자 아들은 아낌이 없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를 증거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3).”

 

이에 우리 안에 계신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아직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늘 한계에 봉착하나 내 안에 계신 진리의 영으로 붙들려 산다. 이는 곧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 우리를 그냥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성령이 내주하심은 나의 의식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육신으로 살고 있지만 육에 속한 자로 살면 안 된다. 근심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어야 그것으로 선을 도모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아이가 우리의 근심이 되나 이로써 회개에 이르며 하나님의 뜻을 더욱 바라고 구하게 된다. 말씀으로 바라보면 어느 것도 허튼 게 없다. 이로써 우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아버지’는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엄하고 무서운, 엄격하신’의 뜻을 갖는다. ‘아빠’는 그와 달리 아람어로 번역한 것인데 ‘친밀하고 온화한, 다정하신’의 의미를 갖는다.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이라니! 이를 성령이 증언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그러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상속자다. 마땅히 그 영광을 위해 고난도 받는다.

 

이는 확실하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 말씀에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 다음은 우리 삶의 열매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 그러느라 오늘 우리로 씨름하게 하시는 일이 때론 고난이다.

 

성령의 열매로 화답하게 하신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삶으로 삶에서 드러나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이를 성령이 증언하신다는 사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말씀을 붙들고 있다 보면 그 깊이와 너비가 아득하고 고요하여 두렵기까지 하다. 경외심이 든다. 곧 내 안에 이는 마음 속 깊은 확신을 느낀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는 성령의 소리다.

 

결국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 영생은 영원하다는 것. 단지 이 땅에 몇 년 더 살고 못 살고의 문제로는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이어서 두려움이 앞서는 영원함이다. 카페에 앉아 메모를 하여두었던 것을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며 연관 지어 정리하는데 또한 놀라움이 다르지 않다. 그 영광으로 벅찬 마음이어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상속자이면 또한 이 고난도 달게 받을 일이다.

 

참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 귀한 말씀으로 확신을 더하시는 일이 놀랍다. 고작 ‘그슬린 나무(슥 3:2)’ 같은 나에게 되레 저들을 구원하라고 하시니,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1:23).” 이 사명이 귀하다. 단지 아이 일로 씨름하는 저에게 그 고통이 복인 것을 알려주는 일은 더디고 오랜 싸움이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듣고 또 듣고, 말해주고 또 들려주어야 하는 말씀이어서, 나는 설교 원고를 준비한다는 명분으로 말씀의 놀라움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이 몸을 입고 사느라 고생이나, 곧 이루어질 몸의 속량을 바란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이는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이어야 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 그러니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심이란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이 이제는 싸워서 이겨야 할 고단한 전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저 애란 그러므로 상징이다. 은유다. 주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모든 논의는 본문 로마서 8장 26-39절로 정리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삼위 하나님이 모두 일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는 성령이 일하신다(26-27). 이에 성부 하나님이  그 사역을 보증하신다(28-32). 이를 성자께서 행하셨다(33-34). 이로써 삼위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35-39).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하여 결코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는 성령의 사역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이를 도우시는 이시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이를 성부 하나님이 보증하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구원은 모두의 것이나 아무나 구원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 나의 존재감은 대단하였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내가 한 일이 아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1-32).”

 

이를 성자께서 이루셨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3-34).” 이 모든 일에 대하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증이 되신다(35-39).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아무 것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그 값은 지불되었고, 이미 승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그러니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아이의 상태를 낫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지만 더 악화시키신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는 아이로 마음이 어려운 저에게 더욱 과감하게 말씀을 던졌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생명보다 귀하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당장 감상에 젖어 마음이 울렁거리는 일이야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리하여 우리 또한 이 육신에서의 속량을 바라며 산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어제 메모해두었던 말씀을 정리하다보니 오늘 아침의 말씀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내가 이루는 게 아닌 것이다. 삶이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산다고 잘 사는 게 아니다. 그 열심이 우리를 도리어 그릇가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두신 바, 나는 무던히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씨름하는 것이다(고후 10:12-13).

 

참 신기하지? 늘 보면 막연하였던 것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목사 고시 때 면접에서 나는 참으로 어눌하게 대답했었다. 어떤 목회 비전을 갖고 계신지 말씀해보세요! 하는 질문에 무슨 생각으로 그리 대답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아는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되돌아보면 종종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어제도 누가 그러는 날 두고 힘들어서 어쩌냐고 안쓰러워해서, 그렇지 않다 난 다만 ‘한 놈만 팬다’고 우스갯소리로 답하였던 것도 그것이다.

 

적이 수백 명이라 해도 내가 상대할 대상은, 그저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라. 얘를 내 옆에 두시니 얘로 인해 씨름할 뿐이다. 누가 마음에 걸리고 어떤 일이 안타까워 마음을 동동거리지만 그저 흉내뿐이라. 더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씨름하지 않는다.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 다만 ‘이 애’, ‘이 사람’, ‘이 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붙들 뿐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성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 약속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날 선택하신 이가 그분이시다. 내가 하겠다고 한 게 아니다.

 

그래서 성령이 나 대신 날 위해 간구하고 계시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내 값을 다 지불하신 영생이다. 나의 율법은 완성된 것이다. 다만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때론 힘에 부쳐 허덕거리는 거야 모든 피조물이 다를 바 없는 일이고, 것 또한 나를 동정하시는 이가 또한 나와 함께 하심으로 거뜬히 감당할 수 있는 문제이었다. 나는 점점 말씀이 참 좋다. 곧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나는 이제 빙충맞아도 아무렇지 않다. 그런 나를 끔찍이 주가 사랑하시니까 말이다.

 

고로 나는 더 이상 나의 외모로, 겉으로 드러나는 한계로 쩔쩔매지 않는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7).” 나는 그리스도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계심을 이처럼 증명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15).”

 

내 분수대로 할뿐이다. 이 정도면 이 정도로 족할 일이다. 나를 이 정도로 지으신 이에게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17).” 아 좋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내가 주를 안다면 주가 나를 높이시리라.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곧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 이로써 충분하였다.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