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전봉석 2018. 8. 4. 07:19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 11:30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편 92:15

 

 

전에 같으면 자존심의 문제였다. 구차하여 민망해하였을 일이다. 아무래도 차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경차를 하나 구입하기로 했다. 다들 문의하면 그 나이에, 좀 더 나은 걸로, 사양을 조금만 높여서, 하는 식으로 말이 길어졌다. 결국은 돈인데 저들이 나를 한심하게 보든 어쩌든 개의치 않았다. 결국 한 매장에 들러 경차로,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 사양으로만 견적을 보았다. 저는 의아한지 뭐 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가난한 목사요, 하고 답했다. 은행 거래 실적이 없어 신용이 잡히지 않는다는 소리에 그리 대답했다.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매장을 지키던 모 과장이란 이는 본인도 실은 유아기 때부터 신자이고, 아내는 지금도 자신에게 목사가 되길 바란다며 조금 전 주고받았던 아내와의 대화 내용을 슬쩍 보여주었다. 앞서는 그리 궁색해보이지 않는데 왜 자꾸 사양을 낮추고 저렴한 것만 찾는가, 하고 심드렁해하더니 나는 가난하여 돈이 없는 목사라는 말에 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여하튼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얼마 전에 기도회를 하면서 좀 구체적으로 차가 한 대 있어야겠다고 아뢴 일이 있다. 너무 답답하기도 하고 그 행동반경이 제한적이라 안 되겠다 싶어서 말이다. 그 시점을 추석이 되기 전에 또 아들애가 잠시 들어오는 귀국 전에 그리 됐으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듯 구하였던 것이다. 모르겠다. 그리곤 잊은 듯 그냥 해본 소리로 말 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그리 되었다. 경차로 족하다. 우리 형편에는 것도 무리다. 주시는 대로 하자.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주의 손길이 느껴진다.

 

아이가 조금 늦게 왔다. 덕분에 설교 원고를 만들었다. 이처럼 글을 쓰며 묵상을 하고 한 날의 삶을 돌아보는 게 말씀이 되었다. 아이가 오는 날은 긴장을 한다. 자꾸 넋을 잃듯 시선을 떨구고 엉뚱한 소릴 하는 아이에게 뭐라 이르고 가르치는 일이,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느낀다. 가령 아이는 충동적인 구매 욕구가 강하다. 돈이 있으면 어떻게든 쓴다. 모자가 몇 개나 되는데 또 샀다. 죄다 비싼 것들이라 소비 성향을 지적하였다. 더하기와 빼기를 나누어 수입과 지출을 쓰게 하였다.

 

시편을 읽기로 한 것은 여러 번 다시 읽고 어느 부분을 필사하기 위해서다. 다행히 아이는 진지하다. 다만 자꾸 까먹을 뿐이다. 공책을 벌써 몇 개째 잃어버린지 모른다. 붓 펜도 그렇고. 해서 그와 같이 필요한 걸 돈을 모았다가 사야 한다고 가르쳤다. 충동적인 구매는 막힌 것에 의해 삐져나오는 자기애다. 욕구가 그리 스며 얼룩을 남기는 것이다. 아이와의 대화는 늘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는 식이다. 이런 걸 계속 해서 무슨 소용인가, 승산이 없다 싶다가도 그러니 어쩌겠나? 그래도 아이가 석 달 만에 주기도문을 외운다.

 

이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말씀 붙들고 나는 그리 확신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지능이 떨어지네, 감정 조절이 되네 안 되네, 그런 말도 필요하지 않다.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공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4:17).” 우리의 승리는 여호와의 공의다.

 

이를 번복할 것은 없다. 아이를 두고 누가 어떤 염려를 하며 마치 자신은 좀 나은 듯 굴 때면 그것이 더 역겹다. 아이는 스스로 인정할 줄 안다. 제가 모자라서, 부족한 게 많아서, 자꾸 까먹어서,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그런 아이의 마음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음성으로 다시 듣는 것 같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그리고 어제 서너 명의 자동차 영업사원과 통화를 하고 글방 근처 한 매장에 가서 구매 의사를 밝히고 저들의 이런저런 주장이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가난하다.’는 것이 도리어 자랑이라는 걸 알았다.

 

그 나이에, 뭐하느라, 왜 돈이 없는지, 하는 따위의 자괴감은 이제 남의 것이 되었다. 전에 같으면 허세가 앞서고 조금은 무리해서라도 허영을 충동했겠으나, 그러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그러느라 우리는 서로 아닌 척, 괜찮은 척, 좀 나은 척, 위선을 떨고 가식을 부리면서 하나님 앞에서마저 내가 남들보다 이러저러 했나이다, 하는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부득불 자랑한다면 나의 연약함이라. 내가 결코 아이보다 나은 게 있어서 아이를 내게 맡기신 게 아니었다.

 

이 은혜가 얼마나 절대적인가? 뭘 좀 해서 나아진 게 있으니 얻은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 사랑일진대 무엇으로 이를 견줄 수 있을까? 내가 애써 수고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은혜란 그 앞에 빈손 들고 서는 것뿐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상대적으로 중3 아이는 단단하다. 자기아집이 강하다. 뭐라 하면 네, 하기보다 아니요, 하는 게 더 많다. 앞에서는 알겠는데 돌아서면 상관도 않는다. 가령 뭐라 문자를 하면 자기 좋은 것에만 답을 한다. 대답이 없어 쩔쩔매다 더는 안 그러기로 했다. 그냥 두는 게 저 아이에겐 더 나은 교육이다. 들으려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들으려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또 그러는 일에 대하여는, 더하기빼기를 가르치면서라도 권하고 또 응원하는 것이다. 주의 마음으로 한다지만 지칠 때가 많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그러니까 말이다. 나 또한 중3 아이 이상으로 자기고집이 강하고 우리 아픈 아이처럼 다 잃은 듯 또 그러기 일쑤다. 내 비록 보잘것없어 업신여김을 받는다 해도 누가 능히 나를 고발할 것인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

 

그런 나를 살리신 이가 그런 나를 위해 오늘도 간구하신다. 나로 하여금 한 영혼을 품고 씨름하게 하시는 이도 실은 저 아이로 인해 나로 하여금 주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게 하려 하심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아니 겨우 경차를 사면서 그 것에서도 사양을 줄이고 쓸모없는 걸 뺀다고 하니 다들 한심스러워하던가? 상관없다. 더는 감정 상할 일이 아니다. 나는 이제 가난과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또한 내게 두시는 하나님의 섭리라. 사랑이라. 다 생각이 있으시다. 주의 마음이다. 나는 아이 일로 늘 시름하는 저 애 이모에게 그리 설명을 보태었다. 욥의 고백을 따라한다. ‘죽이시더라도 주를 사랑합니다.’ 다윗의 시를 사랑한다.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합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마음을 갖는다. ‘도와주시지 않더라도 주를 의지합니다.’ 이미 내게 이 모든 것이 족하였다. 결국은 오늘을 사는 데 있어 가장 확실한 무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처럼 설교 원고를 작성하거나 묵상을 글로 적어두는 유익은 되새김이다.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내가 먼저 씹고 또 씹어 그 맛을 알고 그 은혜로 새 힘을 얻어야 하는 일이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그렇듯 삶은 팍팍하고 있는 자들에 비해 너무 초라한 것 같으나,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이상하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인데 보면 또 이긴다. 것도 쥐뿔도 없으면서 넉넉히 이겼다.

 

그래서 이제는 확신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가난도 질병도 그 어떤 괴로움과 고통도 우리를 더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그렇지, 그렇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아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또는 내게 주어진 오늘의 형편과 사정에 대하여, 더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기죽을 거 없다.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5).” 다만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번성하며 성장하였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시 92:12-13).”  이제는 부득불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