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이 외치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라디아서 1:6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시편 95:1
얼마나 많은 관심과 열심이 또 나름의 수고와 애씀이 그처럼 헛된 것으로 흘러가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우려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복음이라 하며 사람을 좇고 안위와 영광을 스스로 구하는 것에 대하여, 신기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다. 돈과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
물론 우리는 병 낫기도 바라고 어렵고 힘든 처지를 주께 위로 받기를 원하며, 살면서 주를 의지하고 바람으로 새 힘을 얻고 견딜 수 있기를 위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식도 귀하고 부모도 소중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선한 일을 좇고 나름의 이상과 선행을 추구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다. 시작도 될 수 없다. 평생을 간디처럼 살고 테레사처럼 지낸다 해도 그게 선은 아니다. 그보다 앞서는 게 있다. 그보다 우선이 있다. 이내 전부가 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가룟인 유다다. 기껏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복음을 듣고 전하고 실행하며 살던 이였다. 그런데 자신이 바라던 이상과 꿈이 있었다. 선생으로 메시아로 여기며 따랐던 주님의 행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유약하기 그지없다. 한 번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그처럼 나약하게 무너지고 포기할 줄 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다. 저들의 실망은 오히려 악의로 돌변해 예수를 팔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이 되게 하였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엄연히 말씀하셨다. 들려진 말씀이 길가에 떨어졌다 맥없이 사탄이 와서 주워갔다. 돌짝 밭이나 가시나무 밭도 다르지 않다. 염려와 근심이 또는 오래 된 앙금과 원한이 우리들로 하여금 더는 복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요즘은 아이와 자주 있으면서 아이도 아이지만 아이엄마의 마음과 그 주변 가족들의 심경을 안타까워한다. 어제도 녀석은 할 일이 없으니 일찍 와도 되냐고 물었다. 한 시간이 앞서 온 아이는 피곤하다며 책상에 누워 잠들었다. 스물두 살. 다 큰 아이의 자라지 못한 것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우선이 아니다. 전부가 아니다.
내 안에 이는 측은지심을 나는 그리 물리치곤 한다. 괜한 감정이입이 바른 걸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과연 누군들 그 아이만큼 절실한가? 감히 누가 말하길 그 애가 과연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기도하는 게 온전하기나 한 걸까? 나는 이보다 더 교만하고 위선적인 자세를 경계하였다. 최소한 그럼 아이보다 간절한가? 주를 바라며 소중한 마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고 저보다 덜 힘들다하여 이를 축복이라 여기는가? 말씀 앞에서 가소로울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복음에 시달리는지 모른다. 굳건하여 변개가 없는 사람은 없다. 오죽하였으면 사도 바울은 그처럼 절규하였을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루에도 열두 번씩 뒤집어지는 사람이라. 기껏 감사로 시작하였다가 원망으로 끝내는 게 한두 번이던가? 나야말로 아이에 대한 사랑과 아이에 대한 귀찮음이 같이 공존하는 마음이라 싸운다. 길을 가다 우연히 초딩 5학년 아이를 만났다. 아이가 눈길을 피하자 나 역시 얄미워서도 못 본 체 하고 지나갔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 그럼에도 복음 앞에서는 어쩜 그리도 변질이 쉽고 타협과 모사가 능한지 모르겠다. 얼른 내 입맛에 맞춰 옳거니! 하고 마는 습성이라 이 또한 날마다 싸움이다. 아이를 위하였던 기도가 나를 향한 기도로 바뀐 것은 그래서이다. 자꾸 헛된 것만 같아 부질없게 여겨진다. 이런 소릴 해봐야 뭐 하나 싶은 것이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 다 큰 아이를 마치 유치원 아이 다루듯이 지갑은 챙겼는지, 핸드폰은 어디 두었는지, 공책과 연필은 가져왔는지. 그러다보면 벌써 지친다.
어찌 이 아이에게 뿐이겠나? 그래도 정신이 온전하다고 여기는 중3 아이나 대학생 아이도 다를 게 없다. 어떤 문자에 답을 하지 못하는 건 예사고 시간 약속은 번번이 어그러지며 사람 말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마는 데는 아주 신물이 올라올 정도이다. 돼먹잖은 그런 아이를 내 의지나 노력으로 대한다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제 초딩 5학년짜리가 되바라져 말투며 행동이며 어쩜 그리 영악한지. 다 꼴 보기 싫어서 그럴 때면 정나미가 떨어지는 일인데, 그러다 보면 주의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모른다.
나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데도 주님은 이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돌이켜 주 앞에 세우셨고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셨다. 내가 저 모든 아이들을 다 한데 섞어 흔들어놓은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하신다. 이러할 때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힐링이 예배를 대신하고, 심리적인 치료가 말씀 사역보다 신뢰를 얻고, 여러 다양한 프로그램이 버젓이 교회 안에 진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친목이 성도의 교제를 대신하고, 어디에 기부하고 봉사하는 일이 섬김을 가장하면서 우리는 다른 복음에 대해 무감각해져 간다.
그래서 성경은 유념하라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무엇에 대한 유념인가? ‘들은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참 감사했던 습관 가운데 하나가 설교를 노트에 필기하게 하였던 일이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다. 요즘은 동영상이 발달하고 피피티가 활성화되어 굳이 메모하고 받아 적어야 할 일이 없어졌지만, 그때는 참고 성경구절 하나하나를 받아 적어야 했다. 나의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용돈도 주셨다. 본인도 노트 필기에 공을 들이셨다.
유념하는 데 있어 필사보다 좋은 방법도 없는 듯싶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가 주기도문을 외우는 데 석 달이 걸렸고, 그것은 옮겨 적는 게 유용하였다. 어제는 시편 3편을 같이 묵상하고, 특별히 이제 사도신경을 쓰기로 하였다. 신앙고백을 암송하는 데 있어 이를 글씨로 옮겨 적으며 더 예쁘게, 더 정확하게, 더 바르게 마음을 다하기를 위하였다. 방금 전 아이가 카톡으로 자신이 곱게 적은 사도신경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그 잘난 이모나 엄마보다 백 배 낫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또한 좋은 직장에 취직한 어떤 녀석보다 훌륭하다.
이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갈 1:1). 그리 사도 된 바울이 말씀을 전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4-5).” 이 악한 세대에서 아이를 따로 두심이다. 이 악한 세상에서 나를 따로 구별하셨다.
그리하여 주 앞에 나왔던 아이가, 또 함께 시작하였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6).” 그렇듯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지내는 일에 대하여 무슨 말로 돌이킬 수 있겠으며 어떤 권유로 붙들어둘 수 있겠나?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 마음의 치유를 우선으로 하고 이를 영적인 치유인 양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계한다. 좋은 숲을 찾고 마음의 안정을 꾀하는 음식을 무슨 의식처럼 먹는 사람들.
서로 말하는 데 있어서도 말투에 발걸음에 손짓에 표정까지 연출하며 스스로 애써 수고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으로 다른 복음을 삼으려 든다면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 그래서 마음이 나은들? 병이 치유되어 정상적인 삶을 산들? 형편이 좀 나아져 사람들처럼 누리고 호의호식하며 산들? 그래서 더는 바라지 않는 마음도 있고, 다시 더 간절할 수 없는 심정도 있는 것이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이제와 하는 소리지만 나는 아이가 취직이 됐다고 했을 때 어떤 염려가 먼저 들었다. 누가 좋은 대학에 갔다고 할 때, 훌륭한 직장에 취직을 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빠졌다고 할 때면 가슴이 먼저 덜컹, 내려앉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잃어버렸던 세월이 그때마다 고약하게도 십년씩 흘렀다. 이내 또 위기가 찾아오고 어떤 어려움에 봉착해서야 잃어버린 주의 이름을 되찾고는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 사람의 위로와 그 평안을 구하는 모든 수고는 모양은 신앙이나 거짓된 위선이기 쉽다. 여기에는 분에 넘치는 열심도 헌금도 참여도 헌신도 모두 포함된다. 우리의 수고와 애씀은 계시로 말마암아야 한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 말씀 붙들고 말씀 가지고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것은 헛되다.
그 끝은 고약하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을 받고 이를 누구와 의논하지 않았으며 기꺼이 다메섹으로 홀로 떨어져 있었다(15-17).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더 나은 처우를 바라는 자리로 가지 않았다. 늘 말씀 앞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오늘의 외로움이 또는 막연한 고독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알게 되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다른 복음은 없다. 지상 낙원 따위는 없다. 마음의 치유니 내적 평안이니 하는 따위의 말씀 사역은 없다. 도리어 전쟁이다. 알면 알수록, 주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내 안에 저항이 심한 육신의 일과 엄연히 하나님을 싫어하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결과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2).” 주 안에 있을 때 나는 평안하다. 허리는 아파 죽겠고, 이 더위에 보조기는 달궈져 쩍쩍 다리에 달라붙는다 해도, 아이는 헛소리를 하듯 자꾸 엉뚱한 소릴 하고, 깨진 바가지처럼 은근히 돈만 자꾸 지출되는 것 같고, 이래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은 아이들로 마음은 자주 회의에 들고는 하지만,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3).” 내가 주를 바람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 나로 하여금 그리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심이라.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