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23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편 101:2
에베소서는 나에게 남다른 부분이다. 위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이와 마주하며 읽던 책이다. 또한 그때 나는 두 번째 목사고시에서 떨어지고, 이 길이 아닌가하여 돌아갈 참이었다. 늘 생각해보면 그 모든 시기가 절묘하였다. 본래부터 그럴 계획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이가 떠나는 길목에서 마지막 오십일을 함께하였다. 어째서, 어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침마다 우린 에베소서를 읽었다. 때론 한두 구절도 읽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서도 그리하였다. 임종 때 그의 귀에 대고 주께 구하였던 말, 아버지 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이제는 무덤덤할 때도 되었는데, 내 생에 처음이어서 그랬나? “찬송하리로다.” 하는 말씀을 같이 소리 내어 읽을 때의 감격이라니!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3).” 그 복을 주시는 데 있어서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말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그리하시려고 우리가 서로 만나 주를 바라며 구할 수 있게 하셨다는 은혜.
곧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5-6).”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도무지 우리 같은 이들이 어찌 천국에 갈 수 있겠나, 하고 회의하던 그이에게 나는 그 일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이 우주 만물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택하시고 예정하신 일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며칠씩 같은 말을 되풀이하듯 재차 확인하며 확신하였던 일이 기억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장래의 일은 모호하여서 그저 막연할 뿐이었으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저이의 다급함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었다. 믿기는 믿는다고 믿었는데 정작 그 믿음이 확신을 더하지 못할 때의 난감함이라니! 나는 그이의 삐쩍 마른 손을 잡고, 우리로 함께 찬송하게 하시려는 주의 궁극적인 긍휼하심에 대하여, “찬송하리로다.” 하고 찬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찬송할 수 있는 특권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3).”
그 복이란 복음을 가지고 주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뭔가 꾸며지고 덧대어 대단한 구색을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어제 우리는 아이와 함께 예배드리며, 아이는 아직 어설프지만 사도신경을 더듬거리며 신앙을 고백하였는데 나는 이를 그 어떤 찬송보다 고귀하다고 여긴다. 주가 기뻐하시는 것은 보다 완전하고 완벽하고 완성된 것으로가 아니다. 온 마음을 다해 그 정성과 전심으로 주를 바라는 일.
하나님은 그때 내게 한 영혼을 주 앞에 인도하는 실질적인 길목을 같이하게 하시었다. 어쩌다 양가 집에서 각각 섬기는 교회 담임 목사님들이 달려오는 시간에 나는 대신 저이의 임종을 지키어야 했고, 저의 영혼을 주의 손에 의탁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었다. 모르겠다. 여느 목사님들에게는 예사로운 일을 두고, 나는 이처럼 내내 우려먹는 것 같지만 그 감격이 여전하여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 이를 피부로 느끼며 살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대표기도를 주저하지 않았고, 말씀을 듣다말고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하였다.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우리의 임의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8-10).” 우리로 그 뜻의 비밀을 알게 하심이다. 이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서다.
내가 구색을 갖추고 뭔가 애써 수고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그 진행을 우리는 바로 알지 못하나 주가 이뤄가고 계심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 내가 그이의 손을 잡고 임종을 맞으면서 무서움보다 경이로움을, 낯섦과 주저함보다 찬미함을 느낄 수 있었던 감격을 그이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서 평온한 표정으로 말해주었다고 확신한다.
그렇지. 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12).”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하여서 이 순간순간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심이라.’ 그러니까 찬송을 하게 하셨는데 우리 안에서 찬송이 되고 있는 일이었다. 가령 아이의 횡설수설 두서없는 대표기도에 마음이 울컥, 하는 감격은 괜한 게 아니다.
이런저런 더 좋은 여건과 환경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아려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그 일은 이제 내 몫이 아닌 게 되었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그 이름을 두고 주님께 아뢰는 일뿐, 지금은 이 한 영혼이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3-14).” 주가 이루신다. 난 다만 거기 있을 뿐이다.
그때도 이런저런 상황을 두고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딜 갈 수 없으니 저이가 암에 걸렸을 때부터 힘들거나 어려워할 때 통화 정도나 카톡으로 뭐라 이르는 말 정도였는데, 아뿔싸! 양평에서 용인으로 수원으로 옮겼던 이가 마지막 오십여 일을 남겨두고 글방 인근 병원으로 오게 될 줄이야! 그러니 더는 못 간다는 말도 안 통하는 일이어서, 간들 또 뭘 하겠나 싶던 게, 가서 저를 붙들고 기도하게 하시고 그 손을 잡아주며 주의 말씀을 같이 읽는 것으로 전부였으니, 그 일이 되어지던 모든 과정은 신박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그의 충만함으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을 나타내며 드러내는 찬송이 교회이었다. 고작 이 아이가 전부라 내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로 내가 선택할 문제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시 101:2).”
내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함은 주의 집에서였다. 그 집은 교회이면서 동시에 내 몸이다. 이 영혼을 담아내고 있는 육신의 연약함을 붙들고 그것으로 주께 아뢰고 구하는 일이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라! 누구누가 더 나오고, 어찌어찌하여 보다 그럴싸한 교회로 발돋음하길 바라면서도 이는 또한 주의 일이시라.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22).” 이에 주가 이뤄 가시는 일이어서 나는 다만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내게 두신 집, 이 몸의 소망은 이것으로 주를 더욱 찬송하는 일. 교회를 섬김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견뎌내는 삶으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그러므로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