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18. 8. 18. 07:20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에베소서 6:12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6:1

 

 

 

‘영적으로 강해지는 것이 구원이다.’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이로써 장성하여져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러기까지 우리의 씨름은 단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오늘의 말씀 앞에 선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에서 기인하는 것이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2:7).” 아이가 단지 그 병세로 주를 바라는 게 아님을, 나는 확신하면서 아이를 건사하였다. 그래서 더 세상을 바라고 하나님과 멀어져 악의 권세를 좇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니고 허약한 심신을 의지하려 하나님을 찾는다는 식의 발상이 고약하였다. 그렇지 않단다. 네게 두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크고 크다, 확신 있게 말해주었다. 누가 그랬는지 아이는 주춤거리며 그래서 주를 바라나 회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를 더욱 바라는 건 맞지만 그래서 주를 더욱 배척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이 둘의 극점의 간격을 잘 안다. 우습지만 종종 슬픈 노래를 들을 때 나의 지나온 날들이 구슬퍼서 울컥, 하곤 한다. ‘그 저녁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를 송경배의 대금연주로 들으면서 나는 나의 유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고단하였던 삶을 짚어보다 먹먹하였다. 주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과연 나의 오늘은 오늘까지도 얼마나 구차하고 버벅거리며 살고 있었을까? 나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었고, 여전하여서 사는 게 빙충맞기만 한 사람이 있다. 저는 나보다 부자이고 좋은 직장에서 고이 정년퇴직의 날까지 철밥통으로 살아남겠으나 이제 나는 저를 안타까워한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하심을 오는 세대에까지 나타내시려고 나를 돌이켜 자비하심으로 주 안에 거하게 하신 거였다. 아이의 뚱딴지같은 질문으로 마음이 어려웠더니, 그것으로 되레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다시금 확신할 수 있던 하루였다. 이는 단지 느낌이나 그렇다고 여기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주님의 ‘되시고’로 인하여 오늘 날 우리가 그 담대함을 얻은 바가 됨이다. 단지 심신이 미약하니 종교적인 힘으로 살 길을 궁리하는 정도의 신앙이 아니다. 모두가 환자이고 약자인데 저마다 강하다고 여기는 한 주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죄인인데 우리가 성소수자들만을 규탄하고 여느 종파를 매도하며 어떤 상황과 결과를 두고 판단하는 일은 오만하다. 동성애자가 죄인이듯 이성애자도 죄인이다. 이단이나 배교도의 죄악이 크듯이 주를 바로 안다고 하는 자기 확신과 신념이 끔찍하다. ‘크도다 이 경건의 비밀이여!’

 

그리하여 주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감사할 뿐인 것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죄도 없으시면서 죄인 된 몸으로 사람으로 시험으로 받으시는 이로 살다 가신 이의 뜻이 무엇이겠나?

 

그래서 사도는 일갈한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우리의 믿음은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지 우리의 차선책이 아니다. 궁여지책으로 궁지에 몰렸으니 어쩔 수 없이 그리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아이가 쭈뼛거리며 자신은 아프니까 어쩔 수 없이 주를 바라는가? 형은 강하고 능력이 있어 주를 바랄 시간이 없는가? 그 모호한 말에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내가 아이 앞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가 결코 내 것이 아니었다는 데 나는 이제 변명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악함이 어떠한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10).” 그 모든 게 주의 주관하심 아래 놓여 있는 것이었다.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일에서, 그리하여 주의 살아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이 될까? 오후께 아들 녀석이 전화를 주었다. 전 주에 노발대발하며 돈돈거리는 것에 대해 뭐라 꾸짖었더니 내내 마음이 어려웠던 차였다. 나는 이제 네가 잘 되길, 건강하길, 성공하길, 출세하길 바라서 기도하지 않는다. 오직 주를 더욱 바라며 주의 뜻에 합당하기를 위하여 바란다. 나의 모나고 보잘것없으며 선망할 것 없는 존재감으로도 충분하였다.

 

왜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셨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이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려고, 그 긴 세월을 저들은 광야를 돌고 또 돌아야 했던 거였다. 그 길은 참혹하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는데,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시 106:43).”

 

우리의 이 끈질긴 죄성은 죽는 날까지 거듭될 것이다. 결국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 감당이 안 되는 게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우리의 무기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4-46).”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로부터!

 

누구는 병약함으로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신세한탄으로, 누구는 그 잘난 맛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면서 누구는, 누구는, 그리하여 저마다 나름의 갈 길을 가는 것 같으나 이 모두는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허사인 것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47).”

 

결국 이 한 날 한 날의 삶이 곧 혈투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나는 오늘 말씀을 새삼 결연하게 듣는다. 일러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7).”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는 삶으로의 한 날이 귀하였다. 단지 충성이 아니다. 단지 성실함이 아니고, 단지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8).” 이를 행하는 데 있어 ‘주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다.’

 

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다른 방도가 없었다. 더 나은 지식도 없었다. 주신 바 그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어느 부잣집 앞에서의 구걸이면 어떻고, 헌데를 앓으며 개가 와서 핥는 수모이면 또 어떻고, 그저 저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인생이면 또 어떻겠나!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로 사는 게 복이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받을 줄 아는 게 영성이었고 귀한 싸움이었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말씀이 말씀으로만 나의 남은 생을 붙드시기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그리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