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전봉석 2018. 8. 19. 06:21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1:29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주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된다는 말씀 앞에 그 의미가 깊고 새롭다. 늘 어떤 상황에서 무엇에 안주하려 드는 나의 속성을 흔들어놓는다. 은혜를 주신 것은 정체된 상태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이는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의 의도다. 곧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19-20).” 모든 고통은 건지심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무엇에 빠진다는 것은 그 일에 전념함으로 자신을 향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잃기 십상이다.

 

어제 그와 같은 말씀이 그래서였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왜 꼭 그래야 하나? 이제 나의 삶은 낮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이로써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삶이어야 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이 싸움은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12).” 말씀 앞에 앉아 이와 같이 말씀의 이끄심에 지금의 나를 맡기고 있으면 한 날 한 날의 삶이 모두 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안다. 여전히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히는 삶이지만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는 게 참으로 복된 일이었다.

 

오늘 말씀은 이를 돌이켜 알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5).”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6).” 주가 이루신다. 점점 더 그 확신은 현실로 드러난다. 내가 한다고 될 게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로서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일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8).”

 

아내와 함께 중국인 거리를 가네, 송도 신도시를 가보네 하면서 떠났는데 결국은 겁에 질려 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이런 구구한 삶의 흔적들이 모여 나의 나 된 것으로 주를 바라게 하는 일이었다. 안쓰럽고 안 됐고 한심한 일이겠으나 그러므로 주를 더욱 바랄 수 있다는 데 놀라워한다. 언제 이처럼 주를 향하여 간절하였던가? 비로소 주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로 삼으시려고!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7).”

 

이것으로 족한 것을 알게 하시려고. 간신히(?) 마트 주차장으로 들어갔다가 모처럼 장을 보고 그것을 차에 싣고 나오면서 새삼 안도하는 일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겠으나 나는 이와 같은 사소함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 사도의 기도는 그와 같은 핵심이 아니겠나? 분별하라는 것. 허물없이 살라는 것. 의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이어라는 것.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0-11).” 어쩌면 오늘을 살면서 내게 두시는 모든 어려움도 기쁨도, 슬픔도 기쁨도, 낙심도 소망도 모두 이 말씀 안에 담겨 있는 목표점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으로의 길. 그러할 때 가장 귀하고 복된 날들로 가치 있는 값의 삶이 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

 

누구는 어찌 살고, 무엇이 어떻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너는?’ 하고 물었을 때 나의 한 가지 소원, 주의 영광이 찬송이 되는 삶.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그래서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렇듯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겠다.

 

그러할 때 그 삶이 얼마나 평온할까? 거친 풍랑이 몰아치고 당장 모든 게 끝장날 것처럼 군다 해도,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감히 오늘의 내 마음이 그러하다 장담할 수 없으나, 더는 대수롭지 않은 게 되기는 되었다. 까짓 차가 조금 막혀 금세 두려움이 엄습하여 돌아왔다 해도, 구차하게도 마트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다 온 것을 두고 기뻐하는 일에서도, 아이의 장래 일이나 처한 현실의 곤고함 가운데서도!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그리하여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8-29).” 여기에서 분명히 밝히는 바, 하나님께로 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대적 또한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과 둘째는 나의 마음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고로 모든 게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 이 모든 게 주의 선물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구나. 선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는 자로 살며,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빌 1:9-11).

 

아, 그래서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9-21).” 이와 같은 고백이 가능할 수 있는 거였다. 단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참으로 이를 증거 하는 삶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을 더 육신에 거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 곧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5-26).” 그렇지. 그래서 오직 오늘을 사는 자로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고 힘주어 권하고 있는 것이구나!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28).”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었다. 아이에게 줄 핸드폰 케이스를 하나 얻었고, 중3 아이가 모 대회에 원고를 보냈다가 입상하여 상금을 받고 다른 더 좋은 것들을 많이도 받았다며 자랑하는 문자에 같이 기뻐해주었고, 오늘 주일에 말씀을 전해주시러 부모님이 하루 전에 오셔서 주무셨고, 그렇듯 소소하고 사소한 일들을 두고 서로 안부를 묻고 말하느라 한참동안 대화가 이어졌고, 어느새 부모의 늙은 모습처럼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 있다는 사실 앞에 놀라웠고, 이 모든 일들 가운데서 주를 바라고 구하며 감사할 수 있는 나의 날이 귀하였다.

 

다른 날보다 일찍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다 성큼 다가온 가을이 낯설게만 느껴지는데,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말씀은 나를 일깨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앞에 서게 한다. 결국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2-3).” 내가 이를 읽고 나의 이야기를 감사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주의 속량을 받은 것이라.

 

이내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주를 바랄 수 있기 전에 나의 날들이 어떠하였는지, 돌이켜 주 앞에 나올  수 있게 속량하심으로 무엇이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31).” 찬송이란 돌아보아 자랑하는 정도의 것이다. 우와, 하고 놀라워하는 일의 실체다. 입만 열면 자꾸 또 말하고 싶은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내 인생이 어찌 행하셨는지, 그 기적으로 말미암아서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결국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42).” 가만히 인생의 여러 날들을 보며 새삼 깨닫고 확신하는 일이 있었으니, “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40-41).” 그 확실한 손길 앞에 놀라울 따름이다. 주께서 나의 목전에서 이루시는 일이지 않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

 

주일 날 아침, 누구를 생각하고 또 누구를 떠올리며 저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다, 이러고 있는 오늘의 나의 나 됨을 감사드리며,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107: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