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서 1:6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시편 111:9
나에게 있어 ‘은혜를 깨달은 날’은 극명하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 곧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21).” 돌이키신 것이다. 종종 느끼는 것이 더는 전에처럼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는 일에 감사하다. 사람을 기웃거리지 않고 더는 어떤 위로를 탐하지 않아도 되어서 기쁘다. 이는 어리석은 자리였다는 데 통회할 줄 안다. 이제는 함께 어울리며 즐거워하던 친구들을 경계한다.
이 증거는 복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일이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23).” 그리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이 은혜를 깨달은 자로서의 마땅히 취할 생활이다. 점점 문명화되고 더 나아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가령 1912년 2200명을 태운 타이타닉 호는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을 위시해 1500명과 함께 4천 미터 바다에 가라앉았다. 타이타닉은 당시 모든 과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이에 서로들 각성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이듬해인 1914년에는 결국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런 뒤 20여년 후인 1939년에는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런 역사적인 기록은 여전히 우리의 문명이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 오늘 날 이 땅에 태어나 여기, 이 마을 저 사람들과 살게 하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었으니!
이럴 때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선교사가 생각난다. 그는 1718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폐렴으로 죽었다. 당시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를 다니다가 관료주의적인 학장과 교수진을 비판하다 퇴학당했다. 그러자 공교회 목사가 되는 길이 막혀 기회를 얻기까지 선교사로 나갔는데, 이동하며 사는 인디언들과 생활하다 5년만에 폐렴에 걸렸다. 그런 그를 받아 병간호를 맡은 사람은 당시 미국이 자랑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였다. 그의 딸 제루사는 브레이너드를 극진히 간호하다 그녀 또한 폐렴에 걸렸다. 1747년 10월, 데이비드는 숨을 거두었고 그를 간호하던 에드워즈의 딸 제루사도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종종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들을 접할 때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려 알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여전히 아이는 나아지는 게 없었고, 폭풍이 올라온다는 날 폭염으로 나는 어느 때보다 허덕거리고 있었다. 이제 아이들이 개학이라 짬짬이 설교 원고를 작성해두어야 했고, 로마서 10장을 본문으로 여러 번 읽다, 오늘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주의 일일 것임을 확신하였다. 오늘 아침 말씀은 이를 확증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내가 어찌 행하여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어서,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 주가 이루어 가시는 언역의 세계다. 그래서 성경은 더욱 일깨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10).” 주를 경외할 줄 알 때 그 계명은 자유로우면서 마땅한 것이었다. 말씀을 끌어다 묵상하고 이를 살펴 전하여야 할 주의 음성을 듣는 일은 복되다. 귀한 사명이다.
새삼 그리 여겨졌다. 더위로 헉헉거리면서 본문을 가져다 그 관련 성구를 찾아가면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의 고백이 그런 심경의 것이 아닐까? 곧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25).” 내가 이 한 사람, 저 아이를 앞에 두고 같이 주를 바라는 일. 대수롭지 않은 것 같으나 이것으로 큰 역할이라.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8-29).” 곧 목회를 하고 목사를 하는 것만이 사명자가 아니다. 국교회 목사가 되길 바랐던 한 젊은이가 말 한 마디로 인해 퇴학을 당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 길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을 앗아간 타이타닉의 침몰이나 굵직한 세계대전을 통해 어찌 주의 선하심을 고백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1:1).”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데 나는 안도한다. 곧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2).” 어떻게 저를 간호하던 소녀가 폐렴에 걸려 죽고, 딸의 죽음을 앞세운 이가 주의 뜻을 선포하며 그 맡기신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결국은 내가 아는 종교적 지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주를 아는 지식’이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여기서 지식은 두 개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헬라어로 안다는 것은 ‘그노시스’이고 위에 것을 표현하는 ‘에피’가 붙어 지식이라 쓰인다.
즉 지식이라는 헬라어는 ‘에피그노시스’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지식은 단순히 아는 앎도 아니고 막연히 구하는 위에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것,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4).” 이는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사용한 표현이다. 그 확실하게 하려는 것으로 완전히 아는 앎,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주의 뜻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얼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가 선명해진다. 곧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확실한 이 복음에 대해 단지 우리의 어떤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말씀은 내가 가졌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내 입에 있다. 내 마음에 있다. 이를 전하는 믿음이 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그러니 오늘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증명이 되는 셈이다. 말씀이 입에 없다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마음에 없다면 이를 어찌 믿으리요? 우리가 이를 전파하지 않으면 어찌 들으리요? 내가 아이 앞에서 저의 횡설수설 두서없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비록 나의 설명이 또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것 같으나 그 가운데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아이의 입에 담기는 고백 때문이다. 그 마음에 바라는 믿음으로 안다.
비록 가시적인 어떤 변화나 뭔가 대단한 역할이 없는 것 같다 해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는 손을 잡고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문을 함께 외운다. 전에 사귀며 돌아치던 더 나은 훌륭한 친구들과의 대화보다 즐겁다. 누구 잘난 사람의 현란한 논리와 반박의 논쟁보다 유익하다. 물론 아이가 좀 더 나아져서 스물두 살 일상적인 청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지금의 어리숙함을 안타까워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제는 더 나은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신 바, 그대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위해 기도한다.
십대 후반의 한 소녀가 쓰러졌다. 병명은 희귀한 골근육질환이었다. 몸은 굳어지고 심한 통증은 저를 억눌렀다. 소녀의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나날이 고통 가운데 휩싸여 십여 년을 넘게 치료에만 전념했다. 이내 나이 삼십이 되던 어느 날, 그녀는 주의 뜻을 수용하였다. 아무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언제까지 선하지 않다고 등을 돌리고 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수잔 훠쉬’이다.
골결핵(척추결핵)으로 무려 20여 년간 병상에서 씨름하다, ‘있는 그대로’ 지금 거기에 두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녀의 남은 삶은 180도 달라졌다. 그녀의 다짐은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변화는 같은 병상에 누운 환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침울하고 침통한 가운데서 하루하루 견뎌내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그녀의 끔찍한 현실에서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 주의 일인 것을 전파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소문은 이제 ‘수잔 훠쉬 연합’이 생겨 동조하는 무리가 생겨났고 삽시간에 다른 병원으로도 소문이 나서 프랑스 전역 30여 개의 지구가 생겼다.
이런 내용을 읽다보면 오늘 내 앞에 두시는 어떤 암담함이 그 뒤에 숨기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오늘 말씀이 그래서 새삼스럽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그 달라진 것들이 얼마나 놀라운가.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더더욱 주를 바란다. 나의 남은 생이 더는 하나님을 멀리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불어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내게 두시는 이 아이가 증명한다. 날마다 건너와 말을 나누는 노인과의 일도 그렇다.
이는 나의 각오나 다짐이 아니고, 또는 어떤 노력과 수고에 의한 게 아니고 다만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