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전봉석 2018. 9. 1. 07:3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1:3-4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편 119:92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좀 나은 줄 알 때 어김없이 닥치는 불안은 무섭다. 길이 꽉 막혔을 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면 그만일 텐데, 아이가 오면 똥이 마렵고, 새로운 일에 앞서 마음은 늘 저 혼자 들썽거리며, 조심 또 조심 온전히 주를 바라게 한다. 어쩌겠나? 고난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릇 행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는 시편의 말씀을 오래 머금어본다.

 

의외로 아이의 글이 탄탄하였다. 그 흐름이 정확하고 표현력이 좋았다. 그래도 머리에 생각은 있으니까요! 아이의 대답이 일품이었다. 이를 말로 표출하는 데는 어떤 소리가 또는 잡생각이 얼른 끼어들어 아이를 억누르는 것이다. 한데 이 생각에 활자를 입히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함께 어휘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 일정부분 다른 소리나 잡생각을 능가하는 관심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과연 될까? 싶었는데, 아이의 글이 조리 있는 걸 보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글로 표출되는 자기 생각에 만족하였다.

 

아들애가 귀국하여 오후께 같이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나는 강조하기를 사람이 생각처럼 그리 선하지 못하다는 것과 너무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좋은 건 좋은 때나 좋을 뿐 정작 본인도 자신이 본성을 다 알지 못하는 게 사람이라! 어릴 때 아버지가 어느 시골 교회에서 나와 단독목회를 할 때였다. 죽고 못 살 것처럼 한 장로가 의기투합하여 교회 개척에 따른 헌금을 하였고, 그것으로 터를 이룬 뒤였다. 한두 해쯤 지났을까? 무슨 일로 틀어져 저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돈’을 도로 내어놓으라는 거였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소의 소행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의 이름으로 헌금하고 같이 드려 시작한 교회인데, 떠나게 되었으니 도로 내어놓으라는 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말인즉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저도 자신이 그 정도인 줄 알았겠나? 서로 좋은 때야 함께 불 섶에라도 뛰어들 판이었는데, 사람을 보고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아들애에게 주를 바라기를 권하였다. 사람이 귀하고 좋은 건 글 지으신 이가 선하고 인자하시기 때문이라는 걸 말해주었다. 하나님 없이 좋은 사람과 사람 사이란 있을 수 없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우리의 행함은 흑암일 뿐이다. 아무리 선을 구한다 하나 우리가 거주하는 땅은 그늘진 곳이다. 그게 세상이다. 내가 어떤 두려움에 시달리며 불안장애를 겪고 있고, 때론 그 우울감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으로 주를 바랄 수 있는 데 감사를 찾는 이유다. 미국의 어느 젊은 목사가 불안장애로 시달리다 교회에서 목숨을 끊은 모양이다. 두어 해 어떤 스토커에게 시달림을 당하였다고는 하나, 나는 저의 기사를 읽으며 안타까웠다.

 

사람 누구도 강하지 않다. 어떤 사람도 선하지 않다. 불안장애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공포와 두려움을 겪는다 해도 그것으로 주를 바랄 수 있을 때 복이다. 평화롭고 안정되어 주를 멀리하고 외면하는 삶이 무서운 것이다. 결국은 ‘빛이 비치도다.’ 주의 빛이 아니면 어찌 해결이 안 될 흑암이다. 그 그늘이 너무 짙다. 나는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먼 길을 운전하다 순간 꽉 막힌 도로 앞에서 난감하였다. 간신히 그 길을 빠져나와 또 잘 알지 못하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의 공포도 어려웠지만, 이처럼 다시 평안한 아침을 더하심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3-4).”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는 터는 박해와 환난 중에서다. 우리의 인내와 믿음이 더욱 주를 바람으로 자라간다. 견딤이 곧 은총이라. 나는 새삼 오늘 아침 말씀에 고개를 숙인다.

 

축령산계곡물이 장맛비 소리처럼 퍼붓듯이 흐른다. 소리만으로도 청량한 아침, 먼저 늘 그렇듯 말씀을 끌어 앞에 두고 이와 같이 감사한 마음으로 신선한 아침을 맞을 수 있다니!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 119:92).”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미국의 그 어느 젊은 목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고난을 끝까지 견디지 못한 저의 나약함이 내 것이라 나는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란다. 모처럼 아들 녀석까지 하여 이렇듯 자연휴양림에서 아침을 맞는 기쁨이라니!

 

어느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아침을 맞을 때의 그 영광을 생각한다. 누가 더 고단한 삶이란 없다. 누구 슬픔이 더 큰 경우란 없다. 다들 저마다의 고난을 이고 산다. 그 슬픔으로 안달을 하고 복달을 하며 살지만 저마다 추구하는 기쁨의 결은 다른 것이다. 무엇으로 기뻐하며 행복에 겨워할까? 이와 같은 말씀뿐이라.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68).” 내게 가르치시는 삶의 즐거움이 새롭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1:2).” 다른 무엇을 바라고 소원할까? 나는 아이가 불쌍하다가도 저의 어미가 더 안됐다. 그 모친의 피로감을 이해하다가도 당사자인 아이의 고충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다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이다. 이를 한사코 부정하고 더 나은 무엇을 찾는 사람이 있고, 주께 맡김으로 있는 그대로 짊어지고 사는 이도 있겠다.

 

나는 어쩔 것인가? 순간 죽을 것처럼 식은땀이 나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극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힐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주님 도와주세요. 함께 해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말만 되뇔 뿐이다. 그럴 수 있는 게 복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끝까지, 주시는 이 생을 다하는 날까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이 보잘것없는 것을 그처럼 귀히 여기시고 값으로 사신 이에게 영광을.

 

‘빛이 비치도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조금 안이하다 싶을 때 나의 나태한 영혼을 일깨우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그것까지도 주의 손에 지은 바 된 것에 감사를 올린다.

 

나의 예기불안을, 오늘도 길이 막히면 어쩌나, 아들애가 운전을 할 때 잘할 수 있겠나, 이 끊이지 않는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도 주 앞에 앉는다. ‘그가 세상에 계셨다.’ 또한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내가 안고 살아야 하는 장애도 주의 것이다. 아이의 저하된 지능도 그 어미의 고생스러운 우울감도 그 곁의 식구들이 같이 떠안고 살아가는 부담감도 모두 주의 것이다. 이 아침,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의 이름을 되뇐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9:19).” 내게는 주님 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20).” 저들의 고충까지 내가 어찌할 수는 없다. 나는 말씀과 그 증거를 따를 뿐이다. 부디 그러하기를, 그럴 수 있게 하실 주의 은총을 바라며.

 

결국 주의 힘으로만 설 수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다른 더 좋은 수를 바라지 않는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이 좋은 날에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감사를 주께 올려드리며. 곧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57).”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5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