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전봉석 2018. 9. 6. 07:12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디모데전서 3:16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시편 122:9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가정에 맡기신 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이라 한다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6).” 같은 맥락으로 읽고 이해한다. 즉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 그, 교회를 향한 마음이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하는 이 말씀이 크기 와 닿는다(딤전 3:16).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곧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으로 삼으신 우리 자신들이라. 이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시 122:9).” 성경은 친히 나를 위하여 복을 구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가정에 교회를 맡기신 게 아니라 우리 가정을 교회에 맡기신 게 된다. 이를 중심에 두고 무슨 일이나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데 있어 주의 뜻을 먼저 바라는 마음을 주셨다. 이는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 5:2).” 하는 말씀에서 우리의 연약함이 또한 누구를 어떤 아이를 능히 용납하게 할 수 있는 것이구나! 가정예배를 드리며 생각하였다.

 

곧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5-16).” 그럴 수 있는 담대함이 우리 것이었다. 또한 그럴 수 있는 마음을 두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었다. 아이가 와서 성경공부를 하고, 일기를 쓰고, 같이 점심을 먹고 당구도 치는 일에서. 아들 녀석이 뜬금없이 아이에게 내가 집에 데려다 줄까? 하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은연중에 우리로 누구와 더불어 주의 사랑을 나누게 하시는 일, 이는 하나님의 이해와 관여다. 우리로 동행하게 하시는, 일이다. 의도적으로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아들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이며 어떤 사업을 구상하는 데 있어 자연스럽게 나는 주일 말씀을 그리 준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몸, 몸으로 하는 일이 곧 영적인 예배인 것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를 본문으로, 그럼 그와 같은 영적인 예배를 위해 우리가 분연히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일. 둘째, 그러기 위해 오직 마음으로 새롭게 하는 일. 셋째, 그 변화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는 일. 넷째, 이를 분별하는 삶이 사명이었다. 우리에게 두시는 일이었고, 영적 예배이었다.

 

나는 요즘 이래저래 불안에 싸여 있다. 평소의 일정과 다르기 때문이고 아들의 돌발적인 요구 때문이다. 늘 같은 동선을 따라 같은 동작으로 임할 때의 평안을 바라는데 뭔가 해야 하고, 하는 일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긴장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기다 아이는 또 무슨 약을 곁들여서 먹는데 그게 자꾸 잠을 자게 하는지, 더 피로해하고 그래서 연신 하품을 해대면서 시선은 흐트러지고 말은 더욱 두서없이 횡설수설하였다. 그럼 또 긴장을 하여, 나는 요즘 똥이 자주 마렵다.

 

한데 이, 일이 영적 예배가 된다는 말씀 앞에 숙연하고 엄숙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하는 기도가 단순히 막연한 게 아닌 것이다. 가령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은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까지, 땅을 일구고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농작물을 거두는 손길과 이를 유통하여 여러 경로를 거쳐 비로소 우리가 그 값을 치르고 먹는 모든 일에까지 적용이 된다.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보니,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미처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주는 부지런히 일하고 계신 것을 알았다.

 

이어서 그 ‘일용할 양식’을 입에 물고 소화하기까지 심지어 나의 모든 내장 구조를 주께서 주장하지 않으시면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라, 기껏 건강하게 잘 지내는 줄 알았던 이가 뜬금없이 췌장암에 걸려 사투를 벌이고, 어느 건장한 프로레슬링 선수는 담낭암인가 하는 것으로 예순 몇 살에 죽음을 맞았다. 그러니 나의 모든 것을 주가 견고히 하심이 은혜였다. “그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네 가운데에 있는 너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네 경내를 평안하게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시 147:13-15).”

 

여기서의 빗장은 행여 아들이 운전할 때 그 곁을 지나는 숱한 운전자들로부터의 안전이고, 내가 사는 11층 이 집의 구조가 오늘도 견고함이며, 늘 무심히 지내는 엘리베이터 작동에서부터 먹은 걸 소화시켜 똥을 싸는 내 속의 내장구조에 이르기까지, 주가 나의 문빗장을 견고히 하심이다. 나와 내 행동반경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말이다. 곧 우리의 일이란 게 살아서 숨을 쉬고 주어진 어떤 직업을 갖고, 그저 살기 위해 먹는 일이 아니라 그 이상의 위엄과 존귀가 있는 것이었으니, 이 모든 게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가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를 베드로는 절묘하게 묘사하였으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그처럼 존귀한 까닭은 먼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 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래서 둘째,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오늘을 산다는 일 자체가 말이다.

 

그저 우연히 어쩌다 인생이 아니다. 인생 뭐 있어? 하는 말처럼 불신앙적인 푸념은 없다. 이를 놓고 성부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죽어주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성실히 일하고 계신 것이다. 한데 이를 농락하듯 인생을 하찮게 여겨서야! 이를 무시하고 살 때 우리의 열심은 공연한 무게를 짓눌러 되레 우리의 의욕은 과욕이 된다. 우리의 결단은 곧 탈진을 가져오고, 스스로 만족하는 일에서 자기혐오가 생겨난다. 나는 아들이 사업을 하네 어쩌네 하며 여러 구상을 할 때, 그래서 주의 뜻을 바란다.

 

주가 지키지 않으시면 그 어떤 파수꾼의 수고가 허사인 것을. 그러므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시 121:5-6).” 어제 아침에 묵상하였던 말씀을 설교 원고 첫 부분에 넣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러므로 저는 자기의 의를 위하여서 우리를 도우신다.

 

곧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 이를 바로 알 때 더는 다른 귀인을 찾지 않는 일이다. 곧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146:3).” 이는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사 40:23).”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하나님 되시는 것을 알게 하신다. 나는 사람을 구하고 저의 인정을 받고자하여 수고하며 열심으로 살았던 날들을 기억한다.

 

늘 나는 인복이 있다고 자부하였고 저들로부터 얻는 게 많다는 자랑을 놓지 않았다. 가까운 선생이 그러했고 절친한 벗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저들로 인하여 나는 나의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고 한사코 주의 사랑을 쓸모없는 간섭으로만 여겼다. 지금도 하나님과 멀리 서 있는 선생은 나의 가까운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더 나은 세상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듯 구구절절 말이 많다. 쓸데없는 간섭이 길다. 친구는 그래서 멀어졌고 더는 같은 것을 공유하지 않으려 한다. 졸지에 나는 저들에게 한심한 위인이 된 것이다.

 

사람의 죄로 세상 모든 만물이 고생이라. 땅이 엉겅퀴를 내는 것이 저들인들 좋아서이겠나? 동물들이 경계하고 공격적인 까닭도, 식물들이 역으로 땅을 황폐하게 하는 이유도, 그리하여 사람이 그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는 소득이 없고 그와 같은 소득은 늘 허기질 따름이었으니, 우리에게 맡기신 일 그 영적인 예배가 훼손되었기 때문이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다른 더 좋은 수 없다. 괜찮은 다른 방법은 없다. 돈은 돈을 더 벌기 위해 법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저마다 꼼수를 쓰고 어쨌든 요리조리 빼돌리지 않고는 모이지가 않는다. 그게 돈의 생리다. 누가 또 장관자리에 앉는데 그 청렴한 줄 알았던 이가 여지없이 자식 병역문제가 불거지고, 어디 위장전입을 하였었으며, 무슨 집을 소유하는데 다운계약서를 작성하였던 모양이다. 저마다 언론은 개떼처럼 몰려가 으르렁거리지만 그렇지 않고 이 땅에서 부를 축적하고 나름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던가?

 

뒤집어보면 누구도 청렴할 수 없는 구조가 아담 이후 세상의 모든 모습이다. 교황청은 연일 무슨 성추문에 휩쓸리며 침묵을 방어로 내세우고, 어느 개신교 목회자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세간의 집중을 사며 세습이 어떻고, 어마어마한 금액의 비자금을 착복하고 있었고, 잊을만하면 여신도와 무슨 부적절한 언행으로 지탄을 받는다. 곧 모두의 감시와 나름의 엄격한 경건을 자부하는 삶이 이 모양인데 하물며 세인의 삶이란 게 어떻겠나? 우리가 사는, 일. 이 일을 예배로 여기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러고 살아?’ 하는 반론은 우리 목을 조일 것이다.

 

엄연히 성경은 일갈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믿는다고 자부하는 게 신앙이 아니라 그 행실로 드러나는 게 산 증거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점점 나의 객쩍은 소리를 줄이고 오로지 말씀과 말씀으로 인용을 대신하고 예시와 덧붙여 설명하는 말을 생략한다. 더 말해봐야 군더더기일 뿐이어서 말이다. 곧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이와 같은 말씀을 어찌 아들의 마음에 심어줄까? 부디 하고자 하는 일에 앞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바라고 구하는 자세를 갖추게 할 수 있을까?

 

요즘은 내내 주 앞에서 생각이 많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부디 더 좋은 성과를 내는 데 열을 올리기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하는 고백이 우리 아들의 것이 되기를. 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나에게도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다.

 

그리하여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영생의 날들이기를. 고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6).” 우리에게 맡기신 교회라. 예루살렘이라. 영원한 주의 성전이라. 이에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7).” 고로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8).”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