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디모데전서 5:15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편 124:7-8
마치 관성과 같아서 누구나 죄에 대한 향수는 짙다. 아이들도 이상하게 나쁜 건 쉽게 익힌다. 어휘 가운데도 욕이 쉽고 농담이 가볍다. 기껏 같이 시작하였다가 사탄으로 돌아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혹은 여전히 그 무리에 머무는 까닭은 향락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은 단호하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그도 그럴 것이 자기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바라기는 어렵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자기의 의를 따르지는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삶이 지혜였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21-22).” 누구를 위한 게 아니다.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애당초 없다. 그와 같은 ‘위하여’는 결국 자기를 위함이다. 그래서 ‘~위하여’ 만큼 위선적인 자세도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우린 늘 어쩔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 ‘위하여’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향해 사용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저녁에 모여 가족들과 같이 성경을 읽다 생각하였다. 내가 아들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맡기신 아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표현할 때 이미 내 안에는 순수함이 없다. 우쭐하여 나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았다. 한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셨다.
곧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위하여’는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이나 감정보다 그 배경이 더 넓고 풍성하시다. 믿음이란 단지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펼쳐놓을 수 있는 밑그림일 뿐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2).” 말도 안 되는 소린데 내 안에 자리 잡은 믿음은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신다.
먼저는 이 자랑이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을 알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우리를 위롭다 하신 일 말이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곧 예수님은 은혜의 중재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곧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9:24). 이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딛 3:6).” 이는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심이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7).”
결코 괜한 믿음이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이는 말씀이고 약속이다. 우리로 공의로운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말 3:3).” 그래서 굳건할 수 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주 앞에 바로 서게 하신다. 결국 나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이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내가 나 된 사실을 인정한다. 내 안에 늘 선을 바라나 악이 먼저 들어찬다. 아이에 대한 마음도 한결같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그래서 느껴지는 어떤 불편함이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4:4).” 뜬금없이 중3 아이가 ‘가도 돼요?’ 하고 전화를 하였다. 곧이어 다섯 시에 학원을 가야 하면서 그냥 그러고 싶었던가 보다. 오라하고 컵라면을 내어주었다. 이런저런 수다를 들어주고 공연한 참견도 했다. 그러다 지금은 아련하기만 한 어떤 아이들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내가 얘한테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싶었다. 그래봐야 흩어지면 사라지고 말 것을, 하는 어떤 회의가 또 공허함이 느껴졌다.
믿음으로 세운다는 것도 그저 좋은 인간관계로 그리 대해주는 것도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처럼 ‘위하여’ 하는 일은 덧없다. 한데 이 아이가 오늘 여기, 또 그처럼 내 앞에 있는 것은 ‘너를 위하여’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인 것이다. 잘해준다는 일, 그렇듯 신경을 쓰고 마음을 두는 일은 단지 그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의당 나는 그렇게 또 잊히고 만다 해도 우리 안의 ‘선한 DNA’가 전파되는 일이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고는 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그 외의 모든 것은 버려져 불 사를 뿐이다. 오직 예수의 마음만이 남겨진다. 가령 녀석은 부쩍 감정의 기복이 넓어졌다. 나는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하나 알지 못한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또 그 약을 대체하려고 만든 무슨 한약제의 영양식품도 먹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럴까? 장황하게 늘어지는 과장된 표현이 조와 울 사이의 간극을 더 넓히는 것 같았다. 가방에는 고장 난 시계가 들어있었고 정돈되지 않은 문구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누가 선물로 주었는데 차지 않던 모 군대 총장이 준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시계방에 가서 건전지를 새로 넣었더니 그럴듯하였다. 아이는 손목에 차고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모습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냥 잘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이가 횡설수설 기도를 할 때 그 의미를 되새겨 주께 아뢴다. 같이 성경을 읽고 어느 구절을 옮겨 적을 때 아이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아이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를. 이것으로 예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일이었으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실제로 보면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귀찮게 왜 찾아와서, 하는 마음을 누르고 컵라면이라도 내어주는 일. 조울증에 혼자 힘겨워하는 아이에게 어떤 기쁨으로 주를 바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념으로 가지고만 있던 시계를 덥석 내어주는 일.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내 안의 갈등과 싸우는 일.
그 배후에는 무던히 주를 바라는 마음이 기틀이 되어주는 것이다. ‘아이를 위하여’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그리 더하시는 마음으로 ‘주를 위하여’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그리 되는 일들이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면서 두루두루 같이 하는 범위처럼 나의 행동반경은 생각보다 넓어진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는 어림없는 일이겠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그러니까 나 또한 누군가의 그러그러한 마음 씀이 오늘의 나로 있게 하였다. 이제는 저가 누구였는지 기억조차 없는 일이 되었으나 내 안의 어떤 DNA가 실은 예수의 마음이었다. 같이 하다 누군 돌아가고, 곁길로 가고, 떠나갔으니,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그럼에도 우리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상대가 알든 모르든, 아이가 이를 기억하든 못하든, 심지어 내 안에 만족이 있든 없든.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어차피 산다는 일은 늘 새로운 길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 묵묵히 또는 무던히 누가 뭐라 하든. 이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 5:24-25).” 모든 게 드러날 때가 오나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물걸레질로 청소까지 끝내고 나면 한 주가 다 지나간 게 된다. 나는 녹초가 되어 소파에 널브러지고 비로소 평안을 느낀다. 개운한 것 같기도 하고 서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 더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란 가볍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