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하는 마음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디모데전서 6:6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같은 시간에 같은 동선을 따라 같은 일을 한다. 이는 강박적으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말이다. 다들 이래저래 늦잠을 자는 토요일이라, 그러려니 두고 늘 그 시각처럼 글방으로 나아갔다. 싱크대를 사용할 수 없게 된 뒤 모처럼 글씨를 썼다. 아침에 묵상하며 찾아간 말씀을 그렇듯 필사하며 되새기는 일은 귀하다. 어딜 가자 하면서 이번엔 딸애가 운전을 하였다. 나의 불안은 내 의지와 상관없었고, 늘 익숙한 곳이 아니면 고조된 긴장으로 똥이 마려웠다. 결국 늘 가던 도로를 거쳐 자주 가던 마트에 들러 점심을 먹고 나는 그냥 집에 내려놓기로 하였다. 어쩌겠나? 그게 서로에게 나았다. 미안하지만 별 수 없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나의 그런 나 됨에 대하여 자족하기.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게 어쩔 수 없는 불안증 때문이라 해도, 또는 어디 힘든 연약한 육신으로 인한 것이라 해도, 그래서 툴툴거리기보다 그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사는 일. 그런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감히 말하건대 궁핍 때, 비천 때, 배고플 때, 궁핍 때 배우는 바가 더 크다. 그리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이 모든 것은 무모함을 바라지 않는 능력이다. 분수 이상의 것을 꿈꾸지 않을 수 있는 용기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일이다. 허황됨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잠 21:15).” 이로써 의인과 악인의 구분이 확실해진다. 스스로 나은 걸 취하지 않고, 말씀 앞에 방자히 행하지 않게 된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29:18).” 잠언은 순종을 그리 일깨운다. 예수님도 고난으로 비로소 순종을 배우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곧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5:8).” 그러므로 오늘 내게 두시는 고난이 유익하다. 나는 그리 이해하고 적용한다. 늘 보면 내가 너무 어렵다. 어찌 다룰 수가 없어서 쩔쩔매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으면,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내 안에 두시는 선한 말이 나를 위로 하신다. 곧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13:12).” 소망을 두심이다. 이를 가지고 기도한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 119:49).”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더도 못하겠지만 분수에 넘치게 하지 않는다.
괜히들 미안해하는 걸, 다시 딸애에게 말해 엄마와 동생을 태우고 송도에 있는 무슨 공원에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럴 거 없다. 주신 바 그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게 자족일 거였다. 자족은 곧 경건으로 이어진다는 오늘 말씀 앞에 안도한다. 내친김에 잠언의 말씀에서 이를 더 찾아보면, 첫 번째로는 겸손을 배운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우쭐하며 덤비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7-9).” 이를 내게 두신 불안증으로 연관 지어 감사한다면 우스울까?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25:16).” 족한 줄 알고 사는 것이다.
결국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5:18).”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으로 그것이면 충분하였다. 결국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그러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다들 자기 생각이 먼저 앞서는 데 있겠다. 소위 말해 가장 우리를 미혹하게 하는 구호, ‘나는 할 수 있다.’ 하는 자기 각오를 들겠다. 내가 보는 성경은 거꾸로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주 앞에 빈손 들고 서는 것을 은혜의 자세로 안다.
곧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오늘 말씀을 그리 듣고 이해하면 너무 소극적인 해석일까? 자의적인 판단이 되는 것일까? 한데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성경은 늘 일깨우는 것이 우리 사람은 그렇게 대단하지 못하다. 생각보다 선하지 않고 의연하지 못하며 결단을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 최소한 나는 공감한다. 누구보다 나는 그렇다.
그런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안 그럴 수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의 말로를 나는 여럿 봤다. 그리 좇아 분주하게 살던 이들의 일그러진 회환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좀 살만해서 같이 어디 좀 어딜 가려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둥. 노인은 병든 아내를 두고 하는 소리였으니, 그리 모아둔 재산이 허망할 따름이었다. 저의 근심은 저를 찔렀다.
누구를 빗대 뭐라 할 거 없다. 각자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는 게 귀하다. 부쩍 그런 마음이 든다. 다들 어떠니 자기 말에 겨워 할 말이 많은 세상에서 겸손은 결이 다른 세상을 살게 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그 가운데서 인자함도 나온다.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19:22).” 이 영향은 자손에게 미친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13:22).”
성경은 늘 그러하지만 잠언은 특히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한다. 축 쳐진 어깨를 바로 곧추세우시는 것 같다. 그 힘으로 베풀게 하신다.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21:26).” 그니까! 쥐뿔도 없으면서, 자기 코가 석 자인 주제에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31:20).” 어디서 그런 마음이 생겨날까?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10:22).” 주가 더하신 복이라.
이에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나는 그러니 어떠니 해도 내 안에 두시는 평안과 기쁨이 신기롭다. 다들 장성한 아이들 앞에서 나는 이제 기꺼이 노인이 된다. 애써 강해지지 않아도 되는 일이어서 고맙다.
저녁께 동생과 잠깐 카톡을 했는데 ‘큰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고스란히 담긴 싸움에 휘말린듯하였다. 장로 세력과 목사 세력의 분쟁으로 이어져 누가 누굴 밀고 누가 누굴 배척하면서, 새중간에 낀 꼴이 되었으니 그럼에도 잠잠하길. 어느 쪽도 편들지 말길. 스스로 정의를 구현하려 하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그리곤 문득 드는 생각이 사람 그 지겨운 무리의 다툼에서 떨어져 사는 나의 가난한 목회가 감사하였다. 고작 아이 하나 또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게 나의 사역이 전부였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 그리 생각하였다.
어느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뭐 그리 그러그런 일들로 다투고 씨름하던 걸 들고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을 들을까? 단지 이 땅의 삶은 가벼울수록 은혜이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7-8).” 족하다. 오늘의 나의 이 지경의 어려움이 족하고 한심함이 족하고 찌질함이 족하다. 그저 나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4).” 아멘.